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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0 16:11 수정 : 2019.06.20 19:19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최근 영국의 한 증권사 초청으로 그곳의 주요 자산운용사들에 한국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및 국내 자본시장의 책임투자 현황을 설명하고 돌아왔다. 3년 전에도 유럽 4개 도시를 돌며 이와 유사한 미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교할 때 운용사들의 이에스지를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변화는 크게 두가지 요인에 의해 촉발됐다.

첫째, 자본시장 가치사슬의 최상단에서 자금을 배분해주는 연기금과 같은 자산 보유자 대부분이 운용사들에 이에스지 투자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나선 까닭이다. 이는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온 것이다. 이렇다 보니 자산 보유자들로부터 자금위탁을 받으려는 자산운용사들도 이에스지 투자전략 개발에 적극적이고, 운용사의 매매주문을 받으려는 증권사들 역시 이에스지 리서치물 생산에 적극적인 이른바 책임투자의 낙수효과가 연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내가 만난 런던의 한 증권사 직원들은 왼쪽 가슴에 유엔의 지속가능한 발전목표(SDGs)의 17가지 색깔이 담긴 배지도 달고 있었다. 하루하루 수익률 경쟁에만 급급한 한국 증권사 직원들 모습과 오버랩 된 순간이었다.

둘째, 지난해부터 유럽국가에 도입된 새로운 자본시장 규제인 금융상품 투자지침(MiFiD2)이 가져온 변화다. 이 지침 도입 이후 운용사들은 과거처럼 주문수수료를 내고 증권사로부터 무료 리서치물을 제공받는 것이 금지되고 그 대신 자료들을 별도 구매해야 한다. 동시에 신규제가 이에스지 분석을 강조하는 까닭에 런던의 증권사들은 리서치의 차별화 포인트로서 이에스지 분석을 심화하고 이를 유료 서비스화하고 있다. 그간 공짜 제공 이미지가 강했던 증권사 리서치물에 비로소 시장가격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3일간의 미팅을 정신없이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니 만감이 교차했다. 책임투자 및 이에스지 분석에서 금융선진국과 한국 자본시장 간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확인한 까닭이다. 그 격차를 가른 근본 원인 제공자는 바로 연기금들이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핑크가 최근 들어 투자 대상 기업 시이오들에게 편지를 띄우며 이에스지경영, 투명경영, 지속가능한 발전 및 포용성장 등 따뜻한 자본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약 7천조원의 자금을 맡긴 연기금들의 요구사항 때문이다. 돈의 주인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자금을 운용하라고 요구하니 ‘집사’인 운용사 입장에서는 그것을 안 따를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38%에 해당하는 67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운용자금을 보유한 국민연금 기금이 있다. 이 기금은 기관투자자들에게 그 규모만큼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 국내 거대 재벌기업들과의 소유관계나 거래관계에 매여 있지도 않다. 따라서 독립적인 감시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기관투자자다. 다만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으로서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입김만 최소화할 수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최적의 지위에서 한국 자본시장의 책임투자를 확산시킬 수 있다. 즉, 국민연금을 위시한 연기금의 책임투자 확산이 곧 자본시장의 스튜어드십 수준과 이에스지 분석 수준을 격상하는 효과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다. 한국형 책임투자의 낙수효과인 것이다. 부디 세계 3위 규모의 국민연금 운용자들이 유럽의 연기금들처럼 따뜻한 자본을 자본시장 가치사슬의 하류로 흘려보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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