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 프로야구에는 박철순·선동열·최동원이 있었다. 90년대는 이종범·양준혁의 시대였다. 그리고 90년대 말 ‘국민타자’가 나타났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라이언 킹’, ‘일본 저격수’, ‘요미우리 70대 4번 타자’였다. 이승엽(41·삼성 라이온즈). 그는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한 시즌 50홈런 시대를 열었고 2003년에는 일본 야구의 전설 오 사다하루를 넘어서며 아시아 홈런 신기록(56개)을 세웠다. 2006 세계야구클래식(WBC), 2008 베이징올림픽 때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대표팀의 구세주가 됐다. 그러나 ‘홈런’이 그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한 선수’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그는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프로야구 각 구단 감독들을 비롯해 숱한 전문가들이 “후배들이 이승엽을 멘토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내는 이유다. 이제 국민타자의 마지막 타석이 다가오고 있다. 10월3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리는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그는 프로야구 선수로 23년간 뛰었던 녹색의 다이아몬드와 작별한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으니 실패한 야구 인생은 아니었다”고 담담히 소회하는 ‘우리 시대의 영웅’ 이승엽의 삶을 ‘짧게 쓰는 자서전’ 형식으로 정리해봤다. 사진은 이승엽 선수가 9월12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경기에 앞서 타격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글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야구선수 ‘이승엽’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그가 한창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향해 나아갈 때 야구장에 등장한 잠자리채를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 시절, 일본 야구의 심장 도쿄돔에서 쏘아올린 3연타석 홈런을 떠올릴지 모른다. 일본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초라했던 모습이 스쳐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이승엽은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매 순간을 허투루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당당히 박수를 받으며 떠날 수 있는 이유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야구전설로1.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의 주소다. 도로명이 ‘야구전설로’가 된 데는, 충분히 짐작 가능한 ‘한 선수’가 있다. 이.승.엽.
시작은 ‘라이언 킹’이었다. 이후 그의 야구 삶을 관통하는 ‘국민타자’가 됐다. 운동선수의 이름 앞에 ‘국민’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이승엽에 앞서 ‘국보급 투수’로 불린 선동열이 있었으나 ‘국민’까지는 아니었다. 이승엽(41·삼성 라이온즈)은 분명 ‘야구선수’의 범주를 넘어선 선수, 그 이상의 선수였다.
무엇이 그를 ‘국민타자’로 만들었을까. 정규이닝의 마지막, 9회말 2아웃 상황에 놓인 이승엽의 야구인생을 1인칭 시점으로 풀어봤다. ‘진실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그의 좌우명은 그의 삶에 오롯이 배어 있다.
가방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선생님이 나눠준 장래 희망 조사서 자신있게 적었다, 야.구.선.수 난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해야 한다 내가 이겼다, 난 이제 야구선수다
1999년의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제공
3회초 1아웃-국민타자
국민타자. 스포츠신문을 중심으로 어느 순간 나를 ‘국민타자’로 부르고 있다. 부담스럽다. 야구장에서 거의 매일 인터뷰를 하고 오전 6시에도 숙소로 전화가 온다. 자다가 전화를 받고는 한다. 경기에 쏠리는 눈 때문에 동료들에게도 미안하다.
지난해 타이론 우즈(두산)와 홈런왕 경쟁을 하다가 8월에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며 아깝게 홈런왕(우즈 42개·이승엽 38개)을 놓친 터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다. 시즌 20홈런도 빨리 나왔고 2~3개 몰아치기 경기도 나온다. 한국 신기록(43개)은 충분하겠다 싶었다. 이후부터는 그저 ‘덤’이라고 생각했다. 홈런 54개.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한다. ‘이 정도로도 잘했지’ 싶다가도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닌데…다시 기회가 올까’ 하는 마음도 든다.(1999년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은 현재 한국의 종전 홈런 기록(42개)을 이미 경신했다.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1964년에 세운 55개 아시아신기록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기침체 속에서 영웅을 갈구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며 이승엽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줬다. 스타덤에 오르면 이기적으로 변하는 미국 선수들에 반해 이승엽은 깨끗하고 겸손한 자세를 견지해 더욱 사랑받고 있다.” (1999년 9월 미국 <타임> ‘다이아몬드의 드라마가 한국을 달군다’ 기사 중)
“한국 야구사에서 이승엽은 미국으로 치면 베이브 루스, 일본으로 치면 오 사다하루다. 베이브 루스, 오 사다하루처럼 홈런을 펑펑 치면서 많은 대중에게 야구의 매력을 느끼게 했다. 당시만 해도 야구, 축구, 배구, 농구 등이 수평적 인기를 누릴 때였다. 하지만 이승엽이라는 인물을 계기로 다른 종목에 비해 좀 더 야구라는 종목이 국민적인 스포츠로 올라오게 됐다. 대졸 선수가 많은 프로 환경에서 이승엽은 고졸 선수로 한국 사회에 학벌이 아닌 ‘전문성’의 진정한 의미 또한 던져줬다. 이승엽은 지역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넘어 전국구 스타였다.” (허구연 <문화방송> 야구해설위원)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겨냥하는 이승엽을 소개한 미국 <타임> 기사.
경기 5시간 전-야구의 시작
가방 안에서 선생님이 나눠주신 설문 종이를 꺼냈다. 장래희망 조사서다. 자신 있게 꾹꾹 눌러 적었다. 야.구.선.수. ‘내일도 친구들한테 야구장 가자고 할까.’
프로 원년(1982년)에는 3살 위 형이 오비(OB) 어린이회원인 것이 부러웠다. 형은 우승 기념품까지 받았다. 박철순 투수(오비 베어즈)에게 끌린다. 파마머리를 펄럭이는 뒷모습이 멋있고 공을 던질 때도 역동적이다. 83년부터는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회원이 됐다. 이만수 선수는 언제 봐도 홈런을 펑펑 터뜨려줄 것 같다.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다. 반대가 심하시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내가 아니다. 난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 결국 내가 이겼다. 난 이제 야구선수다.(1986년 대구 중앙초 4학년)잠자리채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 국.민.타.자…나 진짜 많이 컸구나 욕설이 날아왔다, 관중석에서 이럴 때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 8회 1사1루, 방망이를 돌렸다, 홈런“(이)승엽이가 야구선수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반대를 많이 했다. 그때는 운동해도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한다는 보장도 없어서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냐 싶었다. 그런데 자꾸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밥도 안 먹겠다면서 1주일 동안 버텼다. 결국 다짐을 받았다. 운동선수 되고 술 먹지 말고 담배도 태우지 말라고…. 승엽이는 그때 ‘야구만 하게 해주면 뭐든지 다 하겠다. 절대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야구를 시작하니까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지금 아들을 바라보면 야구 기록보다는 인성으로, 선수보다는 한 사람으로 신뢰를 받고 있는 게 보여서 참 기특하다.”(이승엽 부친 이춘광씨)경기 3시간 전-부상의 그늘
허리가 계속 아프다. 벌써 3개월째다.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다. 일어날 때도 엄마가 부축해줘야 한다. 야구를 관둘까. 하지만 야구 이외에 할 게 없다. 학교도 한 달이나 못 갔다. 어제는 학교에 갔다가 나오는데 선배가 손을 잡는 순간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걷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많이 났다.
운동을 안 하고 누워만 있으니 몸무게는 10㎏이나 늘었다. 중학교 졸업 즈음에도 7~8㎏이 늘었지만 훈련 때문에 10㎏ 빠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84㎏이다. 몸무게가 느니까 힘은 강해졌다. 청룡기 8강전에서 승리투수가 됐고 홈런도 쳤다. 준결승전에서도 6회까지 2실점으로 막았다. 식욕도 늘어 이젠 냉면 그릇에 밥을 먹는다. 까칠한 성격도 바뀌었다. 내가 봐도 참 순해졌다.
어깨는 계속 아프다. 경기 전에는 늘 진통제를 챙겨 먹어야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그랬다. 집에 말하면 ‘야구를 관두라’ 할까 봐 말을 못 꺼내겠다. 나는 야구가 정말 좋다.(1993년 경북고 2학년)
“이승엽을 중학교 3학년 때 스카우트했다. 당시 이승엽은 왼손 투수로는 전국적으로도 1순위에 꼽힐 정도였다. 상당히 빠른 볼을 던졌고 어린데도 마운드에서 경기 운용이 뛰어났다. 배팅도 팀의 중심타자였다. 1993년 청룡기에서 우승할 때 이승엽의 활약이 상당했다. 혼자서 던지고 치고 다 했다. 결승전에서 결승 홈런도 쳤다. 우수투수상(3승)도 이승엽 차지였다. 다만 팔꿈치가 계속 안 좋아서 3학년 때는 주로 타자로 나섰다. 세계청소년대회 대표로 발탁돼 홈런왕이 되기도 했다. 이승엽과 25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데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한눈도 안 팔고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는 그런 선수다.”(서석진 전 경북고 감독·현 TBC 야구해설위원)
1996년 막 타자로 변신한 이승엽의 모습. 삼성 라이온즈 제공
경기 30분 전-투수, 타자가 되다
등번호 36번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처럼 삼성 왼손 투수의 상징인 권영호 선배의 27번을 달고 싶었는데 신인 선수에게 남은 번호는 2개뿐이었다. 내년에는 다른 번호로 바꿔달라고 할까. 아버지는 한양대 진학을 원하셨지만 나는 일찍 프로에 오고 싶었다. 수능시험 때 일부러 1번, 5번을 찍어서 시험을 망쳤다. 37.5점. 체육 특기생은 40점 이상 받아야만 대학 진학이 가능했는데 ‘의도한 대로’ 떨어지기 충분한 점수였다.
투수조 훈련을 하다가 팔꿈치가 계속 아파 수술을 받았다. 재활이 끝나면 마운드에서 다시 공을 던질 수 있다. 그런데 웬걸. 박승호 타격 코치님이 타자 전향을 권유하신다. 팀에서는 왼손 중간계투로 뛰어야 한다고 하는데…. 난 타자를 하기에는 발이 너무 느리다. 죽어도 타자는 안 한다고 말씀드렸다. 한동안은 코치님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했다. 난 왼손 투수인데!!! 그런데도 코치님은 “한 달만 해보자”며 막무가내로 붙잡으신다.
마지못해 한다고 했다. 재활기간에만 해야지 싶다. 한 달을 연습하니 이번엔 다시 3개월만 더 해보자 하신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무 방망이로 치는 게 재미는 있다. 팀에서는 이제 포기했나 보다. 재활 기간이 끝났는데도 투수조에 합류하라는 말이 없다. 왼손 투수 미련을 머릿속에서 지울 때다.(1995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님이 숙소 방으로 나를 불렀다 ‘한국 야구 체면을 살려줘서 고마워’ 야구는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베테랑이 가야 할 방향을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제시해 주고 싶다
1998년 올스타전 때의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제공
“선수단 상견례 때 본 이승엽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날카로우면서도 또릿또릿 했다. ‘어떤 타자가 되고 싶냐’고 물으니 ‘홈런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네가 하기에 달렸다’고 말해줬다. 이승엽은 가르쳐주면 바로바로 피드백이 왔다. 어느 날은 숙소 겸 2군 훈련장이 있는 경산에 갔는데 이승엽이 훈련하고 있었다. 2군 구장에서 훈련하고 1군에 와서 경기한 뒤에 다시 2군 실내연습장에서 훈련하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참 대단한 아이구나’ 느꼈다. ‘오늘은 없겠지’ 하는 날에도 혼자 훈련하고 있었다. 한 번 마음먹으면 해내고 마는 근성이 강한 선수였다. 타격의 경우 방망이가 가슴 높이에 있었는데 왼쪽 귀 높이로 올리라고 조언해줬다.”(백인천 전 삼성 감독)“처음 이승엽을 봤을 때는 상당히 교타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 사다하루처럼 방망이를 길게 잡고 외다리타법으로 바꾸면서 장거리 타자로 변모했다. 이승엽은 부드럽고 유연한 허리를 이용한 원심력으로 타격할 때 방망이 끝에 힘을 실을 줄 안다. 배트 스피드나 손목 힘도 탁월하다. 다만 외다리타법은 타격 밸런스가 흐트러지면 중심 이동을 할 때 변화구에 상당히 약해진다. 이 때문에 승엽이도 공이 안 맞으면 다리를 안 들기도 하고, 스스로 응용력을 키워 타격 자세를 바꾸기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뚫어왔다.”(박흥식 전 삼성 타격코치·현 KIA 코치)
2003년 10월2일 롯데전에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번째 아치를 그린 뒤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제공
5회말 무사-홈런 56개 신화
지난날들이 스쳐 간다. 틈만 나면 숙소 밖으로 나가 방망이를 돌렸더랬다. 타격 훈련을 더 할 필요가 있으면 여지없이 나갔다. 경기에서 못 치면 억울해서 더 연습했다. 새벽에 경산 숙소 옥상에 올라 방망이를 돌리다가 해 뜨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돌리고, 또 돌렸다.
아시아 홈런 신기록 두 번째 도전. 시즌 초 타율이 1할대로 부진했던 점을 생각하면 성적이 꽤 좋다. 초여름에 몰아친 게 주효했다. 프로 8년간 쌓인 노하우가 나를 지탱해줬다. 우즈와 홈런 경쟁에서 진 것, 54홈런에서 좌절한 것…경험은 사람을 크게 만든다. 쫓기는 기분은 없다. 스트레스 강도는 더 심하지만…올해 끝나면 나는 자유계약(FA) 선수가 된다. 미국, 일본 스카우트들이 경기를 본다니 부담도 된다. 그래도 야구가 잘되니 다행이다. 홈런 한 개 치면 모든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다.
잠자리채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 야구장에서는 참 생소한 것이니까. 국민타자…‘야구 해서 이런 스포트라이트도 받는구나’도 싶다. 나 진짜 많이 컸다.(2003년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56호 홈런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를 가져온 관중들이 이승엽의 홈런볼 대신 구단에서 대포에 넣어 쏴올리는 티셔츠를 받으려고 잠자리채를 뻗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이승엽이 이뤄가는 도전과 성취감이 일반인의 삶에 투영돼 일상의 기쁨이자 자기 삶의 큰 스토리로 자리 잡았다”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요미우리에서 4번 타자로 41개 홈런, 전율이 일었다”
“당시 이승엽 선배와 경기를 할 때면 매 타석마다 홈런을 칠 것만 같았다. 1루 수비를 하면서 쳐다보면 진짜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그 기분, 그 아우라는 지금까지 어떤 타자에게서도 느끼지 못한다.”(한화 1루수 김태균)
“56홈런은 기록 그 자체로도 엄청났지만 그것을 넘어선 의미가 있었다. 2002 축구월드컵 4강도 그랬지만 56홈런을 친 그날은 한국 프로 문화가 기록을 통해 스토리를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일반 사람들이 홈런 공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를 들고 야구장으로 갔고 홈런이 나오지 않더라도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승엽이 54, 55, 56개 홈런을 쳐 나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듯 환호했다. 이승엽이 하나씩 이뤄가는 도전과 성취감이 일반인의 삶에 투영돼 일상의 기쁨이자 자기 삶의 큰 스토리로 자리 잡았다. 이승엽이 타석에서 홀로 작은 공에 맞서 대기록과 싸우는 모습은 야구를 넘어서서 보여주는 감동이 있었고 그런 긍정의 에너지를 대중에게 심어주었다“.(정윤수 스포츠 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아시아 홈런 신기록(56개)을 세운 뒤 아내 이송정씨한테 축하 뽀뽀를 받는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제공
클리닝타임-일본 저격수
삼진을 당한 뒤 돌아서자 관중석에서 욕설이 날아왔다. 그럴 만도 했다. 내 생각에도 너무 방망이가 안 맞는다. 국가대표. 가문의 영광이지만 이럴 때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 ‘내가 왜 왔지’ 하는 후회까지 든다. 7경기 22타수 3안타(타율 0.136) 무홈런. 대표팀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일본전. 2-2 동점이던 8회 1사1루. 방망이를 돌렸다. 홈런. 운이 좋았다.
일본전은 확실히 마음가짐이 다르다. 일본전에 들어가면 모든 선수들이 집중하고 필사적으로 한다. 일본보다 우리가 이기려는 마음이 강한 것도 같다. 첫 일본전은 대표팀 유니폼을 처음 입었던 99년 서울에서 열린 2000 시드니올림픽 예선전. 꽉 찬 관중 앞에서 나는 안타를 하나도 못 쳤다. 그래도 우리가 이겼으니 괜찮았다. ‘나’보다 ‘팀’이 먼저니까.
2008 베이징올림픽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8회 결승홈런을 친 뒤 이승엽(오른쪽)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6 세계야구클래식(WBC) 때는 메이저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미국 팀까지도 이승엽을 포수가 일어서서 받는 고의4구로 거를 정도였다. 이미 2000 시드니올림픽, 2002 부산아시안게임을 거치면서 국제 무대에서 검증을 받았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내가 대표팀에서 본 이승엽은 아주 성실하고 자기 책임을 다하는 선수였다. 2008 베이징올림픽은 해설위원으로 지켜봤는데 부진한 가운데서도 자기 책임은 완수해냈고, 결정적일 때는 해결사 역할을 해줬다.”(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 “이승엽은 일본전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2000 시드니올림픽 예선전), 이와세 히토키(2008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전) 등 일본 대표 투수들을 상대로 드라마틱한 홈런을 치면서 팀 승리에 기여했다. 큰 경기에서 잘하는 국민타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2006 세계야구클래식 4강,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등으로 프로야구 인기가 치솟았는데 800만 관중이 드는 현재 야구 붐의 초석은 이승엽이 다졌다고도 할 수 있다.”(허구연 해설위원) ※1999년 시드니올림픽 예선부터 2013년 세계야구클래식까지 이승엽은 국가대표로 48경기에 나서 타율 0.296, 11홈런 49타점을 기록했다. 2006 세계야구클래식 때는 7경기에서 5홈런을 때려냈다.6회말 2아웃-벼랑 끝 사투
스윙, 스윙, 그리고 스윙. 나도 깡 하나는 대단하다. 호텔 주차장에서 스윙 200개를 채운 뒤에야 나는 일본인 동료들과 식사를 갈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님은 홈런 포함 4타수 4안타를 쳤어도 예외를 인정해주지 않으셨다.
사실 지난해는 좌절만 맛봤다. 거창한 꿈을 가지고 갔는데 스프링캠프 때부터 ‘내가 여기 왜 왔지’ 싶었다. ‘일본 야구에서는 내가 안 통하는구나’도 싶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원정경기 가서 아침 6~7시에 잠을 잔 적도 많았다.
올해는 첫째(은혁)가 태어났다. 내가 못하면 가족이 상처받는다. 나 때문에 가족이 욕을 먹는 것은 죽어도 싫다. 난 가장이다. 감독님은 늘 호통이시다. “핑계를 대지 마라”, “너 자신을 원망해라”, “남의 것을 갖고 살지 말고 네 것을 갖고 살아라”, “네가 가지고 있는 스윙을 하면 통한다”…. 홈경기 때는 다른 선수가 오기 전에 200~250번가량 스윙 연습을 했다. 경기 끝나고서는 유니폼을 갈아입고 바로 또 200~250번 스윙을 했다.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났다. 손바닥을 튜브로 칭칭 감고 다시 방망이를 돌렸다.
삿포로돔에서 30홈런을 쳤을 때 감독님은 원정 숙소 방으로 나를 불렀다. 캔 맥주가 있었다. “한국 야구 체면을 살려줘서 고맙다” 하시며 건배를 제안하셨다. ‘울컥’하시는 게 보였다.(2005년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 “지바 롯데 인스트럭터로 참가해 이승엽을 봤다. 시범경기 때 1할대 타율밖에 안 됐다. 보비 밸런타인 감독은 이승엽을 2군에 보낸다고 했다. 신주쿠에서 이승엽 부부와 밥을 먹는데 야단을 쳤다. ‘넌 항상 무대 중앙에 서 있었고 벼랑 끝에 서본 적이 없지 않냐’고. ‘항상 코치들이 만들어놓은 프로세스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느냐’고. ‘감독이 안 써준다고 하지 말고 감독이 너를 쓰게끔 만들어라’고 호통을 쳤다. 어떻게든 이승엽을 살리고 싶었다. 이승엽은 대한민국 야구의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 타자가 일본에서는 안 된다는 게 너무 싫었다. 30홈런을 쳤을 때는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살려준 것 같아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30홈런은 일본에서도 장거리포 타자로 인정받는 숫자다.”(김성근 전 SK·한화 감독)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 시절의 이승엽. 연합뉴스
7회초 무사-요미우리 70대 4번 타자
요미우리 대표가 나를 불렀다. 예의를 갖춰 ‘대기타석에서 침 뱉는 것을 삼가해 달라’고 했다. 하긴 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니까. 바라보는 팬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어린이들도 있는데…. 돔구장 실내 먼지 때문에 그랬는데 앞으로는 하지 말아야겠다.
요미우리는 내부 규율이 강하다. 염색도 안 되고 귀걸이도 하면 안 된다. 유니폼 바지가 스파이크를 덮어도 안 된다. 더그아웃에서 선수들 간 장난도 허용이 안 된다. 야구의 품격과 선수의 인성이 거듭 강조된다. ‘이것이 프로구나’ 싶기도 하다. 4타수 4안타를 치건 4타수 무안타를 치건 항상 요미우리 계열 신문인 <스포츠 호치>와 인터뷰도 해야 한다.
분위기에 적응되니 의외로 편하긴 하다. 할 것만 하면 된다. 물론 ‘외국인 선수’라는 신분 때문에 성적이 안 나면 가차없이 2군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아베, 다카하시, 고쿠보 등과 친해져서 그나마 다행이다.(2006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한동안 일본 선수로만 팀을 꾸려 일본시리즈에서 연속 우승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는 자부심이 제일 강한 팀이다. 요미우리 4번 타자라는 것은 뉴욕 양키스 4번 타자나 마찬가지다. 일본 야구의 상징적 존재로 계보까지 있다. 그런 팀에서 4번 타자를 하면서 한 시즌 41개 홈런을 때린 것은 대단한 일이다.”(재일동포 최일언 NC 투수코치)
“한국 대표 타자가 일본의 국기라는 야구 종목에서, 그것도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요미우리라는 전통 명가에서 4번 타자로 40홈런 이상을 때려냈을 때 전율이 일었다. 당시 대학에서 전공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고, 진로도 막막했는데 이승엽 선수가 도쿄돔 상단에 홈런을 꽂아넣을 때마다 ‘언젠가 나에게도 빛이 오겠지’ 하면서 응원했던 기억이 있다. 이승엽은 야구선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30대 일반인 야구팬 ㄱ씨) ※이승엽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8시즌 동안 지바 롯데,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뛰면서 159개의 홈런을 터뜨렸다.8회초 1아웃-베테랑의 길
일본에서 돌아온 뒤 야구에 대한 예의가 생겼다. 잃은 것도 많았지만 야구선수로는 참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일본에 갔으나 이제는 야구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다. 끝날 때까지는 진짜 후회 없이 하고 싶다. 은퇴하고 쉴 시간이 많으니까 지금 하나라도 더 해야겠다 싶다. 예전 잘했던 기억으로 ‘내가 낸데(이승엽인데)’ 하고 플레이하면 분명히 기회가 와도 잘 살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20대 몸이 아니다. 그때처럼 하면 분명 실패한다. 2013년엔 그래서 실패했다. 같은 실패를 하면 더이상 회복은 어렵다.
항상 똑같은 타격폼으로는 다른 투수, 다른 투구폼으로 날아오는 공을 칠 수가 없다. 몸 상태, 신체 변화, 상대 투수에 따라 폼은 달라져야 한다. 올해 잘했으니까 내년에도 올해 것을 유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과거보다는 현재, 미래가 더 중요하다.
베테랑이 됐다고 후배들에게 ‘내 자리 넘보지 마’ 하는 것은 권위의식이다. 야구는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하는 것이다. 욕심이라면 베테랑이 가야 할 방향을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제시해 주고 싶다.(2014년 삼성 라이온즈)“이승엽이 성장하는 과정은 독보적, 야구의 미학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선수로 지켜야 하는 품격을 보여줬다” “소비되는 스포츠 스타이기보다는 스포츠계의 이효리 같은 존재 됐으면” “이승엽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선수다. 마흔살 넘어서도 야구선수로서 행동이 괜찮다. ‘내가 선배인데…’ 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후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야구선수로 행동한다. 20대의 이승엽이나 40대의 이승엽이나 한결같다. 일찍 경기장에 나와서 훈련하고는 했다. 후배들이 이승엽을 본보기 삼았으면 한다.”(류중일 전 삼성 감독)
“이승엽 선배와 그라운드에서 뛰는 게 목표였다. 프로 훈련 때 처음 보고 아주 신기했다. 나이 차가 많은데도 평소에 긴장을 풀어주시고 장난도 많이 치신다. 몸 관리를 정말 잘하시는데 야구를 사랑하는 게 눈에 보인다.”(삼성 외야수 구자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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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2아웃-끝을 향하여
“아~아~이승엽 삼성의 이승엽~, 아~아~ 이승엽 전설이 되어라~”
잠실구장에서도, 사직구장에서도 홈 관중석에서 응원가가 터져나온다. 행복하다. 잊힌 상태로 떠나는 게 아니라 홈팬, 원정팬 모두에게서 환영을 받으면서 떠나는 것이라서 기쁘기도 하다. 지금껏 한국 야구사에 이런 일은 없었으니까. 허전한 마음도 들지만 은퇴 투어의 첫 주인공으로, 그 시작을 다음 사람에게 연결해 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든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늘 생각한다. ‘몇 주 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훈련도, 경기도 없는 그런 시간. 끔찍스러울 것도 같다. 돌이켜 보면 야구를 너무 좋아했고 야구선수로 실패한 인생은 아니었다. 남들이 인정해줬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그나마 아이들(은혁, 은준)에게는 잘한 것 같다. 목욕탕에서 아들들 등도 밀어주고 영화관에서 눈물 안 보이려고 애쓰기도 했다. 아내한테는 많이 부족했다. 같이할 수 있던 시간이 적었다. 아내는 말한다. “지금껏 너무 바쁘게 달려왔으니 이제 편하게 있으라”고. 아내와 시간을 많이 갖는 것도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의 마지막 경기 첫 공(시구)은 아내가 던진다.
2년, 1년6개월, 1년…은퇴 시점을 밝힌 뒤부터 그라운드 위 나의 시간은 그렇게 줄어왔다. 라커룸에서 하나둘씩 짐을 빼고 남은 장비를 후배들에게 나눠주는데 홀가분 하다가도 짠하다. 이제 진짜 현실과 맞붙게 된다. 무엇을 하든 나태해지지는 말자 싶다.
현실과 이상은 분명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한테 긍정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서둘러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은퇴 뒤 장학재단은 약속이었으니까. 그 전에 나를 토닥이며 말해주고 싶다. 이제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충분히 하면서 살아가라고.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고….(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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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이라는 선수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독보적이다. 이미지와 실제가 흡사한 선수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승엽은 야구가 보여줄 수 있는 미학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선수로 지켜야 하는 경기 안팎의 품격을 보여줬다. 후배 선수들을 대하는 것만 봐도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게 아닌 같은 삶을 살아가는 선수로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거의 프로 최초인 은퇴 투어만 봐도 그렇다. 인간이 부품화된 일반 사회에서 이승엽과 프로야구 구단들이 행하는 세리머니의 의미는 야구장 안에서의 매너를 넘어 사라져 버린 인간 예의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 뭉클해진다.”(정윤수 교수)
“이승엽처럼 잘하는 선수가 사고 없이 무탈하게 현역을 마감하는 것은 참 드문 일이다. 지금까지 삶의 태도나 무사고 경력이 아니라 스포츠를 통해 얻은 사회적 영향력을 은퇴 뒤에 어떻게 발휘할지 고민했으면 좋겠다. 소비되는 스포츠 스타이기보다는 스포츠계의 이효리 같은 존재가 됐으면 한다. 스포츠로는 보여주지 못했던 가치들을 앞으로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한국 프로야구 복귀 뒤 치른 6시즌 중 2013년을 제외한 5시즌 동안 이승엽은 20홈런 이상을 때려냈다. 국내 통산홈런은 465개(일본 포함 624개, 9월29일 현재). 통산 홈런 2위는 양준혁으로 351개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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