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10 09:30
수정 : 2020.01.10 10:02
메뉴판 읽는 짧은 순간 가장 행복해
멋진 손님 역할 최선 다할 필요 있어
안 해도 되는 설거지·셰프만 할 수 있는 음식레스토랑을 찾는 여러 이유 중 중요한 요소들충동적인 감정의 표출로 한 리뷰레스토랑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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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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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기회만 있으면 새로 생긴 레스토랑으로 달려가 메뉴판을 펼쳐 든다.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며, 내게는 천국이다.
메뉴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순간 예리하게 빛나는 몇 초. 그 짧은 시간은 형언할 수 없는 기대와 희망으로 들뜬다. 레스토랑 방문 열 번 중 아홉 번이 실망스럽다 할지라도 말이다. 무례하고 직업정신 없는 웨이터, 질 나쁜 식재료, 꼼지락대는 주방장, 음식에 너무 많은 소금을 쳤거나 반대로 소금을 너무 아낀 경우 등 식사의 다른 면에서 실망하는 일이 발생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만큼은, 식사를 시작하는 전 그 순간만큼은 내가 여태까지 먹었던 모든 음식 중 가장 멋진 음식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오르게 된다.
셰프는 내게 무슨 선물을 할까? 어떤 새로운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이 미스터리한 순간은 레스토랑이 가진 멋진 장점들 가운데 그저 하나일 뿐이다. 음식의 질과 수준이 주는 감동을 포함한 장점이 많다는 소리다. 훌륭하게 교육받은 웨이터가 본인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일하는 순간을 나는 지켜보며 즐긴다. 평범하지 않거나 희귀한 와인을 고르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도 멋진 일이다. 한국에서는 지방마다 다른 맛과 전통을 가진 소주를 맛본 적이 있다. 꽤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저녁 정찬을 먹으러 나온 멋진 손님 역할을 하는 것도 꽤 좋아한다. 대체 무슨 소리냐고? 돌려서 질문해 보겠다. “당신은 설마 여태까지 외식하러 나가면서 당신에게 주어진 멋진 손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단 말인가?” 당신! 멋진 손님 역을 해야 하는 사람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맞다. 외식하러 나가는 당신은 레스토랑이라는 극장의 일부가 된다. 밥 먹으러 나온 당신은 장면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온전히 당신 몫이다. 당신의 즉흥연기에 달려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부디 즐겁게,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이 부분이 제일 재미있는 부분이니까. 셰프가 주인공이면, 손님은 조연이다. 손님이 주인공이면 셰프는 조연이다. 어찌 됐든, 미식이라는 섬세한 창작물이 세계적으로 예술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추앙받으려면 주인공과 조연이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러니 당신의 역할이 중요하다.
설거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내가 레스토랑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다. (지난날 나는 얼마나 많은 설거지를 해왔던가.) 나는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설거지를 싫어한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누군가 설거지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된다.
그리고 오로지 레스토랑에서만 만들 수 있는 음식들도 있는 법이다. 외식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돈고츠라멘(라면)이 그렇다. 집에서 돼지 뼈를 며칠씩 우릴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집에서 돼지 족발의 살을 발라내고 싶지도 않고 집에서 루아얄식 요리를 만들고 싶지도 않다. 일명 ‘왕실의 산토끼 요리’라고 하는 이 음식은 1775년께 만들어졌다. 산토끼를 삶아 익힌 다음 버섯과 도톰하게 자른 푸아그라 등을 곁들이고 루아얄 소스를 끼얹어 낸다. 이 명칭은 뻬히고흐와 오를레아네 지방이 서로 원조임을 주장하는 유명한 야생 토끼 요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바보같이 복잡한 데다 엉망진창인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이다. 프랑스인들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조리법이다. 푸아그라와 거위 피, 각종 내장으로 속 재료를 만들어 산토끼 뱃속에 삼단으로 차곡차곡 넣고 실로 꿰맨 후 다시 살로 감싸서 냉장고에 휴지시켰다가 굽고 졸이고 해야 한다. 물론 소스는 별도로 만들어야 하고 잡냄새를 없애려면 그냥 먹기도 아쉬운 코냑과 프랑스산 와인 메독을 들이부어야 한다. 하지 말자.
그리고 난 더는 집에서 튀김 요리는 안 만든다. 한 번씩 할 때마다 온 집안에 가득한 기름 냄새를 빼느라고 며칠씩 고생해서다. 난 알고 있다. 나보다 이 요리들을 훨씬 더 치밀하게 준비해서 잘 만들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프로 셰프들이다.
물론 레스토랑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장황하게 써놓은 메뉴판과 대체 팁을 얼마나 주어야 할까 계산해야 하는 점(대부분의 미국 식당에서는 이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한다. 아시아에서는 그 정도로 열심히 고민할 필요 없다)이 거슬린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포기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음식을 내놓는 셰프만큼 나쁜 사람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적당히 나쁜 음식은 기억에라도 남고, 말할 거리라도 준다.
나는 웨이터들이 “맛있게 드세요”라고 하는 게 너무 싫다. 물론 이건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제발 내 돈 내고 먹는 나에게 맛있게 먹어라 어째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난 내가 맛있게 먹고 싶을 때 맛있게 먹을 거다. 내가 결정할 것이다. 당신만 괜찮다면 말이다.
난 어젯밤 저녁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정말 멋진 레스토랑 ‘드 카스’(De Kas)에 가서 저녁 만찬의 극과 극을 맛보았다. ‘드 카스’는 요즘 유행하는 ‘농장에서 테이블까지’를 모토로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다. 시 중앙에 있는 공원 옆에 자리 잡은 큰 온실에서 주방에서 필요한 허브와 식물을 기른다고 한다. 전채 요리로 나온 ‘루꼴라 페스토’는 독극물 수준으로 썼고 양고기는 새까맣게 탔지만, 디저트는 정말 맛있어서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웨이트리스는 나한테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몇 번이고 계속했다. 난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산 저가 발포성 샴페인은 예상치 못하게 맛이 좋았는데, 뒷맛이 섬세한 딱총나무 꽃 같았다. 이건 마치 잔에 봄이 담겨 있는 것, 아니 봄에 잔이 빠진 것인가 했다. 난 네덜란드에서도 와인이 생산된다는 사실도 몰랐다.
요즘 넘쳐나는 소셜미디어와 그 많고 많은 쟁쟁한 리뷰어들을 보라. 레스토랑과 셰프를 비평하기엔 너무나 쉬운 세상이다. 비평은 저녁을 먹으러 나온 많은 이들이 하는 충동적인 감정의 분출일 수도 있겠지만, 클릭 한 번으로, 필터링도 없는 클릭 한 번으로 0.1초 만에 레스토랑의 평판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다. 지금 나는 그들과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파리에서 <미쉐린 가이드> 별을 획득한 레스토랑에서 잠시 셰프로 일한 경험이 만든 변화였다. 이제는 내 앞에 어떤 음식이 놓여도 그저 감사하고 감동을 한다. 아무리 나쁜 레스토랑의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수많은 조정의 과정을 거치는지를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온라인 평가에서 드 카스에 관해 나쁜 점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사실은 한 번 더 가서 먹을 예정이다. 왜냐하면 레스토랑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는 지루함이니까.
마이클 부스(푸드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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