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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9 09:15 수정 : 2020.01.09 09:27

클립아트코리아

박세회의 사람 참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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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쯤 유튜브에서 ‘신도림역 영숙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퍼진 한 교회의 강연 영상이 있다. 김지윤 좋은연애연구소장이 영상에 등장해 연애하는 남녀의 대화 패턴에 관해 설명한다. 남자 친구를 만난 여자가 “오빠 나 신도림역에서 영숙이 만났다”라고 말한다. 이 얘기를 들은 남자친구는 십중팔구 “그래서?”라고 되묻는다. 여자가 “신도림역에서 영숙이 만났다니까”라고 말하면 남자는 다시 묻는다. “싸웠어? 약속 잡았어? 밥 먹었어? 커피 마셨어?” 여자가 대답한다. “아니, 신도림역에서 영숙이 우연히 만났다니까.” 남자는 고민에 빠진다. 내 여자 친구는 신도림역에서 자기 친구인 영숙이를 만난 얘기를 왜 나에게 하는 걸까? 한편 여자가 여자 사람 친구에게 “나 신도림역에서 영숙이 우연히 만났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정말?” 또는 “헐” 등의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물론 잘못된 이분법이다. ‘남자’와 ‘여자’로 대화 방식의 차이를 가른 데는 문제가 많다. 다만 남녀 구분 없이 “헐”이라고 답하는 공감형과 “그래서?”라고 되묻는 목적형 대화자가 나뉘는 건 경험적으로 볼 때, 사실이다.

문제는 진짜 말썽은 이런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짜 문제는 여자 친구가 신도림역에서 영숙이를 단순히 만나기만 한 게 아니라, 싸워서 척을 지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저주하며 헤어졌을 때, 근데 영숙이가 내 친구 정주(가명)의 여자 친구고 다음 주에 넷이서 속초로 여행을 가자고 약속한 상황일 때 발생한다. 이미 펜션 숙박과 서핑 강습료로 50만원의 예약금을 걸어둔 상황에서 최소 비용으로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은 무엇인가? 화가 잔뜩 난 여자 친구와 영숙이를 화해시키고 다 죽어가는 속초 서핑 여행의 목숨을 살릴 방법은 없을까?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풀어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 상황에서는 ‘공감형’이나 ‘목적형’이 섞인 ‘목적 지향 공감형’ 인간이 빛을 발한다. 얼마 전 나는 술을 마시고 한 친구와 얼마 되지도 않은 술값 때문에 크게 다툰 뒤 집에 들어간 적이 있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꼬인 혀로 친구를 저주하며 거실 소파에 앉아 “쪼잔한 영주(가명) 자식과는 다시는 보지 않고 살겠다”라며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꼭 내가 2차를 쏘게 분위기를 몰고 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때 내 아내의 태도가 정확히 목적 지향 공감적이었다. 아내는 나보다 더 크게 화를 내며 “아니, 영주씨는 돈도 더 많이 버는 사람이 20년 된 친구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며 “그 사람이랑 절대 만나지 마”라고 말했다. 아내가 너무 크게 화를 내며 상스러운 얘기를 늘어놓는 통에 술 취한 와중에도 내 편을 들어주는 아내의 따뜻함에 크게 감동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약 20분이 지난 후 나는 반대로 아내를 달래며 “자기야 화내지 마. 영주가 그래도 한번 쏠 때는 크게 쏘는 애야”라며 “다금바리 처음 사준 것도 걔야”라며 빌고 있었다. “다시는 술값 가지고 싸우지 마”라며 아내는 그날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다음날 왜 그렇게 화를 냈느냐고 물어보니 아내가 말했다. “그깟 술값, 화낼 일 아니라고 하면 더 화낼 거잖아. 내가 화를 더 내야 안 싸우겠지.”

세상은 분란과 싸움투성이다. 그럴 때 중요한 건 분란의 내용을 들어주는 제삼자의 역할이다. 목적형 대화자는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고 들어 잘못한 사람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감형 대화자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겐 무조건 잘못이 없다고 편든다. 그러나 목적 지향 공감형 대화자는 두 사람을 화해시킬 가장 좋은 전략적 대화 방법을 찾는다. 순서가 중요하다. 마음 한구석에는 목적을 품고 있더라도 공감을 먼저 내세워야 한다. “헐, 영숙이 걔는 대체 왜 그래?”라고 먼저 말하고,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 다 때려치우자”라고 은근슬쩍 떠봐야 한다. 여행 경비로 걸어둔 예약금이 50만원이라는 사실은 절대, 절대로 대화가 끝날 때까지 입 밖으로 내선 안 된다. 속내를 들키는 순간 공감은 사라진다.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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