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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3 10:33 수정 : 2020.01.03 10:45

하얀 소금 결정으로 이뤄진 우유니 사막. 사진 노동효 제공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만나기로 한 아내
지구 떠돌다 3~7개월 만에 조우
우유니 소금 사막은 매혹적인 풍경
“아내가 있는 곳이 천국, 우린 천국의 시민”

하얀 소금 결정으로 이뤄진 우유니 사막. 사진 노동효 제공

연말·연초는 만남의 절기다. “언제 밥 한번 먹자!”며 뿌린 씨앗을 거둬야 할 때다. 학창 시절 동기 동창, 직장 동료, 심지어 1년 동안 한 번도 연락 못 했던 이들과도 만나 ‘밥(술) 먹는 시간’을 갖는다. 시간의 가성비를 높이기 위해선 ‘송년회’ ‘신년회’란 명목으로 한꺼번에! 가족, 연인과의 날로 자리 잡은 크리스마스에서 설 명절로 이어지니 만남의 연속 아닌가! 지구를 떠도는 여행자도 연말·연초를 맞아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이번엔 우유니에서 보는 게 어때?”

“응, 좋아! 근데 코차밤바에서 먼저 만나서 오루로를 통해서 가자. 소금 사막으로 가는 기차가 지나간대”

“사막을 횡단하는 기차라니 확 당기는걸. 여기(칠레 아타카마 사막)서 우유니로 바로 넘어갈까 했는데. 칼라마로 가면 볼리비아행 국제버스가 있을 거야.”

“보고 싶어, 빨리 와!”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아내였다. 지구를 떠돌다 3개월, 5개월 혹은 7개월 만에 아내를 만나곤 했다. 혹자는 ‘띄엄띄엄 보는 사이가 부부 맞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모든 부부가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건 아닐 것이다. 불규칙한 궤도를 도는 혜성처럼 나는 간헐적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고 또 길을 떠났다. 히말라야든, 안다만 해변이든, 안데스 산맥이든 아내와 조우하는 곳이 ‘집’이었고 그때마다 마중 나온 아내와 신혼여행을 떠났다. 오래 떨어져 지내다 만나면 신혼 기분이니까. 이번엔 우유니가 ‘신혼여행지’가 되고, 사막의 숙소가 ‘집’이 될 차례였다.

우유니는 해발고도 3653m에 1만2000㎢의 면적을 가진 소금 사막으로 비가 내리면 지상 최대 거울로 변하는 곳이다. 지구 곳곳엔 46억년에 이르는 시간이 만든 풍경이 펼쳐져 있다. 평생을 여행하더라도 눈을 다 채울 수 없는 매혹적인 풍경들이다. 어떤 여행자는 그중 우유니 소금 사막을 최고로 꼽을지도 모른다.

아타카마 사막에서 빠져나와 칼라마로 갔다. 다행히 볼리비아행 야간버스가 있었다. 승차 직전 카페 와이파이에 접속해 코차밤바 도착 시각을 아내에게 보냈다. 24시간이 지나야 아내를 만날 수 있겠구나. 낡은 버스가 출발했다. 곧 밤이 오고 다음 날 해가 다시 기울 무렵 버스는 안데스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밤길은 쉴 새 없이 구부러졌다. 아내가 이 길을 지날 수 있을까? 멀미가 심해서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면 30분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멀미하지 않는 교통수단은 오직 오토바이와 기차. 차량 이동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다가 기차 편을 찾아낸 것이리라.

우유니 사막을 경유하는 열차. 사진 노동효 제공

볼리비아 남부를 지나는 철도는 19세기 말 우유니 사막에서 캔 광물을 태평양의 항구로 옮기기 위해 건설되었는데, 하루 1회 승객용 열차가 지나간다고 했다. 해발고도 4000m를 오르내리던 버스가 26시간 만에 코차밤바에 닿았다. 2시간 늦게 도착한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 근 1년 만에 낯선 장소에서 아내를 만나는 기분은, 상상에 맡긴다.

첫날 밤을 보낸 후 오루로로 향했다. 오루로는 남미 3대 축제 중 하나인 카니발로 유명한 도시다. 도착 후 기차역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기차를 기다렸다. 오후 2시 반 기차가 역에 정차했다. 좌석마다 빼곡히 앉은 볼리비아 사람들. 기적이 울리고 기차가 도시를 벗어나자 풍경이 변했다. 사막 가운데 물 고인 곳마다 플라밍고가 날고. 덜컹덜컹. 느긋함이 지루함으로 넘어가려던 찰나, 창밖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사막 너머로 지는 황홀한 일몰.

밤 9시 넘어 우유니 기차역에 닿았다. 예약해둔 숙소로 갔다. 투어는 다음날부터 시작이다. 우유니 사막을 관통하는 대중교통이 없으니 여행자들은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는데 2~3시간짜리(일출·일몰 시각에 맞춰 출발, 물이 고여 소금 사막이 거울처럼 보이는 곳으로 이동 후 사진 촬영이 끝나면 숙소로 데려다주는 프로그램. 인증샷을 에스엔에스에 올리는 게 주목적으로 이 프로그램 이용자의 90%는 한국인과 일본인이다)부터 4박5일짜리(우유니 사막 곳곳의 명소를 지나며 숙박, 식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하다.

아침 8시. 칠레에서 온 두 친구, 독일에서 온 커플. 나흘간 함께 여행할 친구 포함 6명의 승객을 태운 4륜 차량이 우리를 ‘기차 묘지’에 내려놓았다. 20세기 초 광물 가격이 하락하면서 광업사가 문을 닫자 증기기관차는 버려졌다. 한창땐 하얀 입김 같은 수증기를 내뿜으며 파란 하늘 아래를 달렸던 기차들이 사막 가운데 녹슨 철골만 남긴 채 멈춰 있었다. 뼈만 남은 미라처럼.

마을에서 멀어지면서 더 넓은 소금 사막이 펼쳐졌다. 하얀 바다 같았다. 아니, 이곳은 실제 바다였다. 빙하기 이전 지각 변동으로 솟아오른 바다가 빙하기 이후 녹으며 소금 호수로 변했다가 건조한 기후로 인해 수분은 모두 마르고 두께 1~120m의 소금 결정만 남아 소금 사막이 되었다. 우유니에 온 여행자는 특수 촬영 놀이를 하며 논다. 블루 스크린과 컴퓨터그래픽 작업 없이도 사진을 합성한 듯한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엄지만 한 소인, 뛰어봤자 아내의 손바닥 안이다, 찰칵.

우유니 사막에서 하는 사진 놀이. 사진 노동효 제공

서울 면적의 20배에 이르는 소금 사막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는 물고기섬(Isla Del Pescado)이다. 현지인은 낮은 산을 섬이라 부른다. 우기가 되면 소금이 비에 녹아 산이 소금 바다 가운데 섬이 되기 때문이다. 옛 지명은 ‘잉카와시’로 잉카 전령이 쉬던 곳이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선 저항군의 은신처가 된 크레이트 행성으로 등장한다. 루크 혼자 ‘퍼스트 오더’ 대군에 맞서는 장면도 이 일대에서 촬영했다. 산은 키 큰 선인장으로 뒤덮여 있다. 1년에 1㎝씩 자란다고 하니 높이 1m면 100살, 높이 5m가 넘는 선인장들은 수령 500살이 넘는 셈이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 크레이트 행성으로 등장하는 우유니 사막. 사진 노동효 제공

우유니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함박눈이라도 내린 듯 소금이 온천지를 뒤덮고 있었고, 소금 침대 위에 깔린 매트에 누워 잠을 잤고, 침실을 걸을 땐 바닥에 깔린 소금 때문에 싸락싸락 눈 밟는 소리가 났다. 이처럼 완벽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있을까. 게다가 소금은 부패를 막는 결정체지 않은가. 영화 <중경삼림>의 카피는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였다. 만약 유통기한을 ‘만년 후’로 적을 수 있는 공장이 있다면 우유니에 있지 않을까. 소금 사막에서 나눈 사랑의 기억은 결코 썩지 않을 테니까.

사막 가운데 소금 온천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여행자들. 사진 노동효 제공

사흘째는 간헐천과 소금 온천을 지나 기이한 형상으로 솟은 바위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우유니가 소금 사막으로 변하기 전 빙하가 실어온 바위였다. 사막 가운데 펄럭이는 듯한 형상의 바위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연상케 했다. 그래선지 살바도르 달리가 우유니를 여행하고 유사한 풍경을 그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볼리비아에 온 기록이 없지만, 우유니 사막을 달리다 보면 종종 달리의 작품 속을 지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유니 사막의 간헐천. 사진 노동효 제공

한번은 소금 사막을 자전거로 횡단하는 여행자를 만났다. 국적을 묻자 프랑스인이라고 했다. 첫 만남 이후 자전거 여행자를 드문드문 마주쳤다. 여행자의 국적은 알 수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면. 그는 일본 국기를 꽂고 있었다. 우유니 사막을 자전거로 횡단하는 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국기를 달고 모험 길에 나선 여행자는 왜 언제나 일본인, 아니면 한국인일까? 투어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 또 다른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다. 알래스카에서 출발해서 아메리카를 자전거로 종단 중이라 했다. 그에게 물었다. “왜 국기를 꽂고 다니지 않니?” 그는 대답했다. “여행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지, 국가가 아니잖아.”

우유니를 떠나던 날. 터미널 부근 인파를 피해 한 줄로 걷는데 뒤따르던 아내가 곁에 서며 말했다. “자긴 배낭을 메고 있을 때가 제일 멋있어!”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정말? 그럼 오늘 저녁 샤워하고 나서 배낭만 메고 침대로 들어갈게.” 깔깔깔, 아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은 행복했다.

문득 이탈리아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한국인 아내와 동해의 작은 어촌에 살던 그에게 이국에서의 삶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아내가 있는 곳이라면 이 세계 어디든 천국이지!” 그리고 덧붙였다. “단, 좋은 배우자라야 해. 나쁜 배우자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서로에게 지옥이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사실 우유니든, 서울이든, 도쿄든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다. 누구랑 있느냐에 따라 같은 장소에서 천국을 누릴 수도 지옥을 견뎌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나는 이렇게 응수했더랬지.

“그럼 우리 둘 다 천국의 시민이로군요!”

글·사진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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