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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짬을 내 목욕 여행을 다니고 기록으로 남기는 안소정 작가.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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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ㅣ 세신 문화
3년간 목욕 문화 기록자 안소정씨
옥수탕·자유탕·앵화탕·항도탕·왕림탕 등
최근 목욕 관련 책도 출간해
“물이 주는 기쁨”에 반하고
“작은 행복의 가치” 알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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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짬을 내 목욕 여행을 다니고 기록으로 남기는 안소정 작가.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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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욕 가방을 들고 낯선 골목을 거닐다 ‘목욕합니다’라는 세움 간판을 발견하면 반갑게 달려가는 사람. 안소정(30)씨는 3년 전부터 주말마다 목욕 여행을 다니고, 목욕을 기록하는 이다. 올 초 여행 에세이 <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를 출간한 후, 목욕 경험의 원형이 되었던 한국의 동네 목욕탕을 기록하는 중이다.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아현동 한 카페에서 안소정씨를 만났다. 물론, 목욕탕도 함께 갔다.
―그동안 일본 온천 120여곳, 한국의 온천과 목욕탕은 74곳 방문했다. 목욕탕을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을 일이다.
“벳푸 온천 지역은 인기 여행 코스로 온천이 밀집돼 있지만, 한국 목욕탕은 그렇지 않다. 홍보 일하는 직장인이니까 평일에는 회사 다니고 주말에 목욕 여행을 다닌다.”
―왜 목욕 여행에 빠졌나?
“4년 전 친구와 일본 여행 중에 노천탕에 들렀는데, 자연과 물이 주는 기쁨이 너무 컸다. 순식간에 반했다. 그때부터 ‘온천 명인’에 도전했다. 온천 명인은 일본 벳푸시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관광 장려 프로그램이다. 이름이 거창하다 보니 ‘넌 뭔데 명인이라고 설치냐’는 댓글을 받은 적도 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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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끔하게 관리된 진해 ‘옥수탕’의 탈의실과 욕조. 사진 안소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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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을 고르는 기준이 있나?
“목욕탕이 있을 법한 큰 도시와 위성 도시를 샅샅이 뒤진다. 각 지자체에서 격년으로 내는 ‘공중위생서비스 평가’ 자료가 큰 도움이 된다. ‘목욕장업’이 따로 분류되어 있다. 녹색(90점 이상), 황색(80~90점 미만), 백색(80점 미만) 등급으로 나뉜다. 위생 등급이 괜찮고 조금 오래된 곳이면 주저 없이 들어간다. 진해의 옥수탕(경남 창원시 진해구 충장로445번길 6)은 근대문화유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리나 보존 상태가 좋다.”
―목욕탕 애호가로서 어디에 주로 관심을 두는지 궁금하다.
“바가지나 탈의실 열쇠 같은 소품도 좋아한다. 목욕탕 타일에도 꽂힌다. 1990년대는 목욕탕을 많이 짓던 때다. 당시 타일회사는 목욕탕용 타일벽화 코너를 따로 만들고 여러 도안 카탈로그를 배포했다. 한 번은 타일벽화 안에 시공 업체의 사인과 전화번호가 남아있어서 검색해봤으나 이제는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요소들로 목욕탕의 연식을 가늠할 수도 있겠다.
“구석구석 살피면 언제 만들어졌고, 어디를 고쳤는지 알게 된다. 옥수탕도 오래된 곳임을 단박에 알았는데, 바닥에 크기가 제각기 다른 둥근 자갈 모양 타일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탕 안에는 한 단 정도 턱을 만들어 의자처럼 쓸 수 있게 돼 있는데, 옛날 목욕탕들은 그 턱이 굉장히 좁다. 목욕탕 중앙에 길쭉한 바가지 탕이 따로 있는 곳도 30년 이상 오래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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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정 작가가 발견한 예쁜 목욕탕 타일. 사진 안소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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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보다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목욕탕은 뉴욕에도 없을 것’이라고 한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다.
“진해에 있는 자유탕(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중로 74)이다. 이름이 ‘자유탕’이니까 설계할 때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조각할 작정을 한 게 틀림없다. 1990년대 초반에 지어진 목욕탕인데, 현 업주는 왜 그 조각이 있는지 모른다. 업주가 계속 바뀌거나 리모델링을 여러 번 했으면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마산에 100년 넘은 목욕탕 앵화탕(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화남1길 5)도 현 사장이 인수한 지 겨우 2~3년 지나서 정확한 역사가 남아있지 않다. 사장은 시에서 근대문화유산 책 만들 때 사진을 찍어간 것만 알더라. 시설은 2000년 초반에 보수한 것 같은데, 그런 변화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목욕탕 커뮤니케이션’ 노하우가 있을까? 여행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고 친해지듯 말이다.
“아무리 많이 갔어도 대부분 낯선 곳이다. 두리번거리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포지션을 취하면 손님이 다가와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주거나 물건도 빌려준다.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달 목욕’(한 달 목욕권)을 사서 여유롭게 다니는 일명 터줏대감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이야깃거리에 개방적이다. 탕에 앉아만 있어도 별별 이야기를 다 듣는다. 여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고, 유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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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한옥 목욕탕 ‘왕림탕’. 사진 안소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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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은 뉴트로(복고풍) 유행을 타고 낭만이나 향수 어린 공간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다녀보면 낭만 타령하기 죄송할 정도다. 그들은 생업이고, 생업의 장래가 밝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좋았던 시절과 지금이 너무 차이가 난다. 몇 년 안에 업을 접을 생각하시는 이도 많다. 손님 10명도 찾지 않는 날이 있더라도 100명이 찾던 예전과 똑같이 문을 열고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 얘기를 남길 필요가 있다. 지금 목욕탕으로 기능할 때 기록하고 싶다.”
―목욕 여행을 하면서 인생의 의미 같은 걸 얻었나?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기쁨과 온천에 들어갔을 때 몸과 마음이 풀리는 작은 행복의 가치를 알았다.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 책 냈고, 블로그(blog.naver.com/murita)에 목욕일기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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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항도목욕탕’에는 수영장이 있다. 사진 안소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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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최근 다시 목욕탕에 가기 시작했다. 대중매체가 권장하는 미의 기준에 벗어난 진짜 평범한 몸들을 만나고, 나도 그 안에 섞이면서 편안함도 찾았다.
“다니다 보니 화장이 불필요하고 불편해진다. 화장을 안 하기 시작하니 자유롭고 편안하다. 몸이나 얼굴에 대해 긍정하게 된 계기다.”
―‘목욕’의 가치를 말해 달라.
“‘우울은 수용성’이란 말이 있다. 씻으면 달라진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든다. 집에서 샤워만 해도 그러할진대 대중탕에 가면 더 클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와 있는 거다. 의사들도 권고하는 게 집에서 샤워하고, 끼니를 잘 챙겨 먹고 낮에 집 밖으로 나가 보라는 거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게 목욕이다. 일본에서 할머니 한 명이 혼자 목욕하는데, 정말 느리게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정갈하게 씻는 것을 봤다. 씻는다는 것이 숭고한 일이구나 하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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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여신상 조각이 이색적인 진해 ‘자유탕’. 사진 안소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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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 여행 코스는 많아도 목욕 여행은 드물다. 여행 일정에 넣는다면 어디가 좋을까?
“군산 항도탕(전북 군산시 구영7길 69)은 옛날 여관식 호텔을 같이 운영해서 묵으면 목욕을 무료로 할 수 있다. 근처가 근대역사 거리라 볼거리도 많다. 탕 안에 수영장이 있다. 알몸 수영이 가능하다. 관절 운동이 필요한 노인들을 위해 마련한 시설이다. 경주 왕림탕(경북 경주시 봉황로110번길 5-2)은 내부 리모델링했지만, 외관 한옥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매력적이다. 가족이 대를 이어 하는 목욕탕이다. 근처에 시장이 있어서 목욕 후에 주전부리하기도 좋다.”
―앞으로 계획은? 꿈꾸는 목욕탕이 있는지 궁금하다. 목욕 컨설턴트가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일본엔 1인 가구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는 목욕탕이 있더라. 언젠가 나도 그런 것을 실행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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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아현동 ‘제일목욕탕’에 있는 목욕탕 그림 시계.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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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목욕탕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안소정 작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제일목욕탕(서울 마포구 신촌로28가길 33) 지민정(51) 사장의 전화다. 마지막 손님이 목욕을 마쳤다고 했다. ‘목욕 기록자 인터뷰’ 역시 목욕탕에서 하는 게 제맛이다. 평소 세신사 외엔 아무도 옷을 입지 않는 곳에 양말만 벗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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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 문화 기록자’ 안소정 작가.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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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목욕탕은 영업 시작일이 1998년께로 되어 있지만, 훨씬 이전부터 목욕탕이었던 곳이다. 남탕 이발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온 동네 노인은 50년도 더 다녔다고 증언했다. 지 사장은 거동이 편치 않은 손님을 아예 탕 안까지 안내한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본래 시어머니가 하던 목욕탕이고, 10년 넘게 운영하던 분도 떠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올 2월부터 맡게 되었다. 한증막 온도만 바뀌어도 손님들의 여론이 들끓는 줄 미처 몰랐다.” 지 사장은 제일목욕탕에 스민 시간의 흔적을 해치지 않으면서 조금씩 적응하는 중이다. 입구에 걸렸던 낡은 시계가 강풍에 날아가 없어진 것을 안소정 작가가 아쉬워하자 지 사장이 시계를 꺼내왔다. 고쳐서 다시 걸기 위해 보관했단다. 빨간색 목욕탕 마크가 있는 시계는 누군가 손수 시트지를 오려 만들었다. 언제 누가 솜씨를 부렸는지는 모른다. 어디에도 없는 제일목욕탕의 시간이다.
글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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