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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8 20:31 수정 : 2019.11.29 16:24

박세회의 사람 참 어려워

‘눈치 챙겨’는 어쩌면 펭수가 시대에 던지는 날카로운 선언인지도 모른다. 펭수의 인기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해 난감했던 적이 있다. 한 달 전, 펭수의 이름이 기획 회의에 처음 나왔을 때 “게시판에서 인기 있는 콘텐츠라고 자가발전 중인 펭귄 아니냐”는 무식한 발언을 내뱉었다가 “젊은 층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은 데 그런 말을 하느냐”는 타박을 들었다. 찾아보니 당시 펭수의 유튜브 구독자는 이미 20만을 넘었더랬다. 그것도 대단했는데, 이제 펭수는 잡지 화보를 찍고, 외교부 장관과 만나는 거물이 됐다. 촉이 없으면 눈치라도 챙겨야 하는 법이다.

시대가 원하는 ‘간’이 변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공감하려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펭수를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고 펭수의 유튜브 채널 영상을 쭉 살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입덕영상’(팬이 되기 위해 보는 영상)까지 찾아보고 나서야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도저히 펭수에게 깊이 빠져들 수는 없겠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사실 펭수 영상에 큰 감흥이 없는데 사람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자 펭수의 열렬한 팬인 한 20대 후배는 “펭수를 좋아하는 감성을 이해 못 하면 이해 못 하는 대로 제발 놔뒀으면 좋겠다”고 경고했다. 조심스럽게 “어떤 지점이 가장 매력적인지를 설명해 달라”고 물었더니 “펭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세대의 순한 맛 사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교육방송> 김명중 사장의 이름을 존칭 없이 부르고, 가르치려 드는 25년차 〈교육방송〉 최고참 뚝딱이 선배에게 “잔소리는 거절”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귀엽고 시원하다고 한다. ‘순한 맛’에 방점이 찍힌다.

서른 중반을 넘긴 남녀 두 커플이 모인 자리에서 펭수의 얘기를 꺼냈더니 다들 20대 후배의 진단에는 동의했다.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호르몬이 왕성하게 활개 치던 시기에 과잉 콘셉트의 대중문화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 세대다. 한 친구는 “내가 10대 때는 록 음악을 주로 들었는데, 가사를 생각해보면 악마를 찬양하거나, 법을 무너뜨리자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닭의 피를 마시거나 기타를 부수는 정도의 무대 연출은 보여줘야 그 아티스트가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다. 악마적 세계관에도 여지없이 열광했다. 최면에라도 걸렸던 걸까? 국내 대중문화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30대 중반이면 이미 사춘기 초입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들었고, 얼마 안 가 ‘전사의 후예’로 갈아탄 친구들이다. 그런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이들에겐 펭수는 당연히 좀 싱거울 수밖에 없다. 과연, “요새는 지나치게 저급한 개그를 날리는 지상렬보다는 좀 순한 맛 버전인 데프콘이 호감”이라든지, “거침없이 선을 넘나들던 전현무보다는 선 위에서 스케이팅을 타는 장성규가 대세”라는 얘기도 있다. 매운맛과 순한 맛 사이에 옳고 그른 건 없다. 이걸 오해하면 또 ‘눈치’를 분실한다. 시대 상황의 흐름에 따라 취향의 ‘간’이 달라졌을 뿐이다. 괜히 “펭수가 뭐가 재미있느냐”고 시비를 걸지 말라는 의미가 ‘눈치 챙겨’라는 한 마디에 담겨 있다.

펭수와 관련해 눈치 못 챙겨서 일어난 참사는 참 많다. 펭수는 펭귄이라는데, 자꾸 사람 취급하며 신원 확인을 하려 들고, 성별이 없다는데 계속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물어보는 식이다. 개중 비현실적으로 흥미로웠던 지적이 하나 있다. 모 일간지가 단독으로 전한 ‘펭수 외교부 청사 출입 규정 위반 논란’이라는 기사다. 펭수가 외교부 청사에 들어가면서 펭귄 탈을 벗어 신분 증명을 하지 않아 청사 출입 규정을 위반했다는 내용이다. 기사에는 “테러 등의 위협이 상존하기 때문에 출입자 신원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행사에 참여하는 마스코트나 캐릭터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등장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기사 때문에 행정안전부가 “(펭수와 제작진의 출입은) 서울청사 입주부처가 청사에서 단체행사를 진행할 때와 동일한 출입방식으로, ‘서울청사 출입보안매뉴얼’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공식 입장까지 냈다. 압권은 마지막에 있었다.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아무개 의원이 펭수의 외교부의 출입 절차에 대해 따질 건 따져야 한다면서도 말미에 “펭수가 온 국민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함께하겠다”라고 덧붙인 대목이다. 눈치를 챙길 수 없다면, 여러분은 펭수와 함께하실 수 없다.

글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 에디터), 사진 유튜브 ‘자이언트 펭 TV’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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