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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21 09:23 수정 : 2019.11.21 20:15

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마찰 땜에 잘 터지는 바지

총체적 난국인 내 몸

마지막 남은 긴 바지가 또 터졌다.

워싱이 과하지 않고 핏(fit)감이 좋아 아끼던 블루진이었다.

나는 한 번 산 물건을 은근히 오래 쓰고 잘 못 버리는 편인데, 바지만큼은 예외다. 일단은 내 체형이 독특해 처음 바지를 살 때부터 애를 먹는다. 골반은 작은 편인데 허벅지는 (몹시도) 굵다. 체중에 비해 배는 덜 나온 반면 옆구리 살이 많다. 이 때문에 허벅지에 맞춰 옷을 고르면 골반 쪽이 남고, 허리에 맞춰 옷을 고르면 허벅지가 끼고, 밑위가 짧은 바지를 고르면 어김없이 두툼한 ‘러브 핸들’(연인이 손으로 허리를 감쌀 때 만져지는 옆구리 살을 뜻하는 신조어)이 생기고…….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다. 어찌어찌해서 꽉 끼는 바지를 골라 입으면 자연스럽게 천이 늘어나 조금 편해지기 마련인데, 문제는 비로소 내 몸에 딱 맞게 바지가 늘어나는 그 시점 즈음에 어김없이 허벅지 안쪽, 그러니까 양 허벅지 살이 맞닿는 부분이 터지고 만다는 점에 있다. 봉제선을 따라 예쁘게 터지는 것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마찰로 원단이 쓸려 얇아지다 못해 구멍이 나는 것이니, 수선조차 힘들다. 비만인이 되고 난 후 입던 거의 모든 바지가 그렇게 사망선고를 받았다.

아무리 좋은 원단의 고급 브랜드 바지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나는 언제나 스파(SPA) 브랜드에서 그나마 질기고 합리적인 가격의 바지를 구매하곤 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3년여간 내가 거의 전적으로 애용해온 브랜드가 하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름을 거론할 수조차 없어진 ‘유OOO’ 브랜드. 불매운동의 대명사가 된 ‘유’브랜드는 기성복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빅 사이즈 (36인치 이상의, 동양인의 체형에 맞게 골반과 허벅지가 넉넉하면서도 기장이 과도하게 길지 않은) 옷을 싼 가격에 공급하는 업체였다. 사라진 선택지 앞에서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름에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고무줄 반바지 몇 개를 돌려 입으면 됐으니까.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날이 추워지고 더 이상 반바지로만 버틸 수는 없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잠옷 용도인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다니며 버텼으나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특히 가을이 시작되고 여러 지자체나 도서관, 국제도서전 등지에서 책 관련 행사가 잡히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도 그런 곳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갈 수는 없었다. 특히 모 항구 도시에서 열리는 국제 작가 회의에서는 아예 이와 같은 공고문이 메일로 전송되어 오기도 했었다.

“국제 행사이므로 정장 혹은 단정한 캐주얼을 착용할 것을 권고합니다.”

절친한 정영수 작가에게 이 문구를 보여줬더니 아무래도 너 때문에 일부러 만들어진 조항 같다고 했다. 그간 내 행적(?)을 보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몇몇의 대중 브랜드와 큰옷 전문 사이트에서 바지를 찾아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바지를 찾는 데 실패했다. 결국 집안을 뒤지고 뒤져, 나는 오래전 사놓고 어정쩡해 입지 않은 바지를 찾아냈다. 허리는 과도하게 큰데 허벅지와 종아리가 꽉 끼는 것으로 봐서는 레귤러 핏으로 나온 블루진을 실수로 구매해 입지도 않고 처박아 놓은 것 같았다. 어쩌지 고민하다 묘안이 떠올랐다.

우리 동네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거의 화타처럼 옷을 수선해주는 집이 하나 있다. 연세가 있으신 사장님은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낀 채로 바지 기장에서부터 가죽 재킷의 밑위까지 모두 수선하는 그야말로 수선 장인이시다. 인간문화재나 다름없는 사장님이지만 문제가 하나 있는데 일부러 가서 독촉하지 않으면 절대, 정말로 절대 옷을 수선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임박한 행사 날에 맞추기 위해 바지를 들고 수선집으로 달려갔다.

사장님은 내게 바지를 입어 보라고 하시더니 허리며 밑단 여러 군데에 시침 핀을 꽂아놓으셨다. 그리고 커다란 산더미 같은 옷 무덤 위에 내 블루진을 턱 얹어 놓으며 말씀하셨다.

“다음 주 월요일에 와.”

예전의 나였으면 순진하게 월요일까지 기다렸겠지만, 30대의 난 그토록 호락호락하진 않지!

“사장님 저 많이 급한데…….”

“얼마나?”

“오늘까지 해주시면 안 돼요?”

“오늘은 안 돼. 다음 주.” (단호한 어조였다.)

“어쩌지……중요한 자리라……오늘 꼭 입어야 하는데…….”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고, 이내 사장님이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알겠어. 이따 5시에 와.”

나는 알고 있다. 오후 5시에 와도 옷은 수선되어 있지 않으며 사장님은 손바닥만 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오래된 드라마를 재방송해주는 채널을 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국제 작가 회의 참석하게 돼
맞는 바지 없어 힘겹게 수선

역시나 5시가 되어 내가 가게 입구에 들이닥치는 순간 사장님은 마치 처음 겪는 일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대답했고, 옷 무덤에서 내 청바지를 건져 올리셨다. 내가 덩치에 비해 너무 작은 스툴에 앉아 핸드폰으로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 사이 너무나도 어정쩡하고 기장이 긴 레귤러 핏 블루진이 비로소 내 몸에 맞게 고쳐졌다.

주말, 나는 무사히 그 청바지를 입고 국제 작가 회의에 참가했다. 한 세션 당 3시간이 넘는 기나긴 행사였는데, 실은 허벅지가 사정없이 조여서 힘들었던 점을 밝힌다. 나와 함께 참석한 동료는 내 귀에 대고 “너 왜 이렇게 스키니 진을 입고 왔어. 요즘엔 레귤러 핏이 대세래”라고 말했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이거 레귤러 핏으로 나온 거야”라고 대답했고 친구는 터져나갈 듯한 종아리를 보며 빵 터졌다.

레귤러(Regular)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보통의, 평상시의 , 균형 잡힌…….

레귤러 사이즈. 보통의 사이즈. 균형 잡힌 사이즈. 도대체 누굴 위한 레귤러 핏이란 말인가!

행사와 옷 사이즈에 관련된 굴욕(?)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번은 출판사를 통해 한 유명 의류 브랜드의 매장에서 행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행사에 참여하면 거마비와 더불어 해당 브랜드의 아우터 한 벌이 지급된다고 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 브랜드의 옷을 입고 언론 노출을 늘리는 조건이라고 했다. 어차피 입을 옷이 마땅치 않던 나로서는 땡큐였다. 피팅을 위해서 행사 시작 시각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오라는 행사 담당자의 말을 듣고 나서는 그러나, 조금 불안해졌다. 백화점이나 아웃렛에서 그럴듯한 옷을 구매하려고 해도 국내 브랜드의 경우 아예 사이즈가 없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중년 남성을 주고객으로 하는 브랜드인 만큼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행사장으로 향했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매장에 들어서자 출판사와 의류 브랜드의 직원들이 나를 반갑게 마주해주었다. 그중 유달리 표정이 어두운 사람이 한 분 계셨다. 출판사 홍보 담당자는 그분을 이 매장의 매니저님이라 소개하며, 얼른 옷을 입어 보자고 했다. 나는 쭈뼛쭈뼛해진 채 가방을 내려놓으며, “아이고 저한테 사이즈 맞는 옷이 잘 없을 텐데……”라고 말했다. 표정이 좋지 않던 매니저가 나에게 성큼 다가와 대답했다.

“네. 없을 것 같네요.”

“네?”

“맞는, 아우터가 아예 없을 것 같은데요.”

“아, 네……. 역시 그렇죠. 종종 그래요. 그럴 수 있죠.”

몹시도 단호한 매니저의 표정 앞에서 나는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민망한 냉기가 감돌았다. 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얼른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어 무대 연단 쪽 의자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주변 구경을 하고 오겠다고 매장 밖으로 나섰다.

기분이 나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왜 기분이 나쁘지. 대단한 모욕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적당한 옷이 없다는 것뿐인데. 그래, 매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전문가로서 그저 사이즈가 없다는 팩트를 전달한 것뿐이겠지.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자,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유명 의류 브랜드 홍보 행사에 초대돼
옷도 주는 행사인데 담당자 날 보더니 난색

나는 내 몸을 긍정하지 않는다.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작가로 데뷔하던 초반에는 질겁하던 부하게 나온 사진도 요즘은 그냥 그렇구나 한다. 이전에 나는 내 자신의 몸과 정신이 고유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내 스스로가 레귤러 핏 블루진이 될 수 없음에 자주 절망해왔던 것 같다. 지금의 내 변화가, 나의 무뎌짐이 싫지도 좋지도 않다. 그냥 자연스럽게만 느껴진다.

나는 요즘도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내가 운동하는 것을 알리지는 않는다. 운동을 한다고 하면, 심지어 웨이트 트레이닝을 배우기까지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종의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다소 방어적인 미소를 지으며, 오직 건강을 관리하기 위한 생존 운동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애초에 그토록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밤 굶고 자야지 다짐하면서도 폭식을 일삼지는 않겠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기성복이 무엇인지, 레귤러 핏이 무엇인지, 건강이 체형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는 채 나의 인생은 오늘도 똑같이 흘러간다.

글 박상영(작가), 일러스트 윤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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