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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3 20:47 수정 : 2019.10.24 02:08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18

누구나 나쁜 기억은 있어
청와대·대기업 다닐 때 우울증 겪어
하지만 쓰다 보면 근심은 사라져
일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결과 해석은 내 몫···미래로 나아가는 일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학부모 모임 강의에 종종 간다. 30~40대 여성이 대부분이다. 그들끼리 깔깔 웃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전까지 어머니는 꽤 오래 투병하셨다. 그 동안 집안엔 웃음기라곤 한 올도 없었다. 간혹 엄마 친구들이 병문안 왔을 때 웃음소리가 방에서 빛처럼 새어 나왔다. 어떤 땐 엄마가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엄마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뻤다. 손님들이 사온 파인애플 통조림, 종합 과자 세트도 수북했다. 행복한 기억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행복한 눈물이 난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노트북 자판이 안 보일 만큼 눈물이 흐른다. 누가 남자는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했는가. 카페 옆자리 여성이 힐긋힐긋 쳐다봐 눈치는 보이지만, 이렇게 후련한데 말이다.

누구나 기억이 있다.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많다. 몸서리 처지는 기억도 있다. 기억에는 감정이 묻어 있다. 감정이 스며있지 않은 기억은 회상되지 않는다. 내 기억에는 분노, 수치심, 죄책감, 그리움이 배어 있다. 비굴함과 비겁함도 숨어 있다. 나의 첫 번째 치유 글쓰기 대상은 이런 기억 감정이다.

중학교 시절 전주 고속버스대합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청소하는 아저씨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청소해야 하니까 지금 당장 나오라고 했다. 개수대에 떠온 물을 끼얹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한 마리 벌레 같았다. 이런 내용을 글짓기 시간에 썼다. 그때 느꼈던 분노와 적개심이 다소간 잦아들었다.

기억은 뇌가 내게 하는 하소연 같다. 이런 기억으로는 힘드니 제발 좀 들어달라는 애원이다. 그런 간청을 글로 쓰면, 이젠 됐다고, 알았으니 됐다고, 들어줘서 고맙다며 가슴속에 틀고 있던 감정의 응어리를 푼다.

나는 일부러 기억을 떠올린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잊기 위해서다. 기억을 글로 쓰는 일은 뇌가 느끼는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일이다. 쓰고 나면 나는 이렇게 되뇐다. ‘그럴 수 있지’,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다 그런 사정이 있었어’.

기억은 합리화되고 미화되기도 한다. 5년째 스테디셀러인 <대통령의 글쓰기>를 쓰고 난 후 함께 일했던 분들에게 감수를 부탁했다. 놀랍게도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다. 뇌가 스토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내게 유리하게 각색한 것이다. 좋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은 뇌의 충정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런 뇌를 믿고 기억을 써보자. 기억의 고통에서 나를 구원하고 해방시키자.

기억이 과거 일이라면 두 번째 치유 대상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나는 겁이 많다. 혼나는 게 무섭다. 그래서 뭐든 열심히 한다. 성실하단 소리는 듣는 편이다. 청와대에서도 글을 강박으로 썼다. 못 쓰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 마감 때까지 못 쓸까 봐 늘 불안했다. 걱정이 되니 꿈에서도 글을 썼다.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이때 시작된 과민성대장증후군은 나의 지병이 됐다. 한두 번은 공황장애도 경험했다. 하염없이 추락하는 느낌,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맛보기도 했다.

장차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마다 글을 쓴다. 각오와 다짐을 쓰지 않는다. 목표를 세우지도 않는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대 수준을 낮춘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마음먹는다. 해야 할 일을 못 했을 때는 이제부터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을 때까지는 기회가 있다. 살아 있는 한 언젠가 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다독인다.

나아가 미래를 객관적으로 진단해보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막연한 비관이 근거 있는 낙관으로 바뀐다. 자신감이 꿈틀꿈틀 올라온다. ‘잘 될 거야. 잘할 수 있어’, ‘까짓것 해보는 거야. 아니면 말고’, 보기 나름이고 마음먹기 달렸다.

한술 더 떠 꿈같은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소망, 비전을 생각한다. 죽기 전까지 글쓰기 책 10권 쓰고 100만부 팔 거야. 내용과 상관없이 존재만으로 환영받는,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감을 주는 강사가 될 거야. ‘글쓰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될 거야. 이런 꿈을 꾸는 내게 작은 걱정은 더 이상 걱정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뿐 아니라 당면한 현실에 관해서도 쓴다. 세 번째 치유 글쓰기다. 대기업 회장비서실에서 일할 때 우울증으로 사표 낸 적이 있다. 일하기 싫고,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태는 요즘에도 간간이 경험한다. 일상이 허무하고 삶이 공허하다. 무기력이 극에 달한다. 이런 때도 글을 쓴다. 한 일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일이 내게 일깨워준 의미를 적어본다. 쓰다 보면 의미 없는 일이 없다. 하기 전에는 반신반의하는 일도 있지만, 하고 나면 항상 잘했다고 생각한다.

일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고, 뜻하지 않게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도전과 시련의 원인, 응전하고 반응한 결과를 해석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감정은 내가 정한다. 내 마음이다.

일상에서 뭔가를 선택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때에도 다섯 가지 질문을 글로 쓴다. 나는 먼저 내가 모르는 사실에 관해 묻는다. 다시 말해 공부한다. 또한 그것이 왜 그런지 의문, 즉 문제의식을 가져보고, 남들이 하는 말에 관해서도 반문해본다. 그런 후, 그렇게 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무엇인지 내게 묻고, 끝으로 그것이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인지, 혹은 옳은 일인지 자문해 본다. 이렇게 물으면 뇌가 응답한다.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진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나의 고민 상담소다. 고민을 술로 풀지 않고 글로 푸는 내가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마지막 네 번째는 관계로 인해 생기는 감정을 치유하는 글쓰기다. 관계와 관련해서 나를 괴롭히는 감정은 네 부류다. 시기와 질투가 첫 번째다. 중학교 때 나는 반장으로 청소 감독을 했다. 한 친구가 청소 시간에 혼자 공부했다. 남들 다 청소하는데 너만 공부하느냐고 따졌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선생님께 일렀더니 그냥 놔두라 하셨다. 하굣길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청소 안 하는 그 친구 욕을 했다. 그런데 친한 친구가 그랬다. “너는 더 그래.” 표현해 보고 알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 이후 청소 안 하는 그 친구가 밉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열등감과 자기비하다. 남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데서 비롯한 감정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 이전 나의 모습과 지금의 나를 비교한다. 남보다 낫기보다는 이전의 나보다 나아지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기보다는 스스로 칭찬하며 추켜세운다. 누군가 ‘잘 났어. 정말!’ 같은 댓글을 달아도 개의치 않는다. 그냥 잘난 체하며 제멋에 살기로 작정했다.

외로움, 고립감도 관계가 주는 아픔이다. 어릴 적 초저녁이 되면 엄마들이 “누구야 밥 먹어라”라며 소리쳤다. 친구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신작로에 혼자 남겨졌을 때 쓸쓸하게 아렸다. 초등학교 때 전학을 두 번이나 하면서 이전 학교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중학교 때는 집에 오면 빈방에 화면 조정 중인 티브이(TV)만 덩그러니 있었다. 요즘에도 누군가 그립고 이유 없이 외롭다. 그런 때 내게 말을 건다. 나는 나와 말이 가장 잘 통한다. 나는 내게 가장 솔직할 수 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도, 나를 제일 아끼는 사람도 나다. 나는 그런 나와 대화한다. 외롭지 않다.

관계의 위기인 갈등 상황도 나를 힘들게 한다. 서먹함과 불편함을 넘어 증오와 혐오 감정이 일기도 한다. 여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상대에 대한 감정 표출만으로는 앙금이 풀리지 않는다. 일단 받아들여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애쓴다. 내가 느끼는 분노의 감정이 온당한지도 따져본다. 남에게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 내가 무어라 한들 변할 가망이 없는 남에게 내 감정을 맡겨둘 순 없는 노릇이어서 그렇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치유의 힘을 발휘하지만, 시간이 지나 써놓은 글을 읽을 때 그 효과가 더 크다. ‘아, 그때 이랬구나.’ 반추하면서 위로받고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독백에 머물지 않고 글을 남들에게 보여줘 고백하면 고해성사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글을 읽는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도 있다. 이 글도 누군가에게 그런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주 안도현 시인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글쓰기 강의를 다녀왔다. 나는 혹시 하는 노파심에 휴대전화 배터리를 두 개씩 갖고 다니는데, 이번 여행에서 모두 잃어버렸다. 속이 상한다. 아내는 왜 두 개씩 갖고 갔느냐고 나무란다. 그래서 이렇게 썼다. 노트북 잃어버리지 않은 게 어딘가. 아니 살아서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인가. 이번에도 참 잘했어요, 강원국!

강원국(<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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