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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2 20:52 수정 : 2019.10.02 21:00

그림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의 지옥 여행

그림 김태권 만화가
지옥에도 근사한 장소가 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철학자 소크라테스, 시인 호메로스, 이슬람의 관대한 군주 살라딘 등 쟁쟁한 인물이 지옥 한곳에 모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선 이 훌륭한 분들이 왜 지옥에 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나. 어려운 문제다. 어찌 보면 입시와 닮았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기준으로 뽑았다”고 학교는 주장하지만, 학생은 불만이니까. 여기서 뽑는 쪽인 학교가 심판을 하는 ‘신’, 뽑히는 쪽인 학생이 심판을 받는 ‘인간’인 셈이다. 학교마다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학생을 뽑듯, 종교나 문화권마다 천국에 받아주는 기준이 미묘하게 다르다.

크리스트교의 천국 선발 기준에는 ‘과락’ 같은 제도가 있다. 의로움이니 자기희생이니 다른 과목 점수가 아무리 높아도 ‘믿음’ 과목을 패스하지 못하면 ‘불합격’ 처리되는 것이다. “착한 일 하면 천국 간다”는 말은 크리스트교에서는 절반만 사실이다. ‘믿음’이 없다면, 그러니까 ‘교인’이 아니라면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글쎄. 착하게는 살았어도 교회는 안 나가던 사람이라면 “그동안 납입금은 꼬박꼬박 넣으셨으나 약관 제666조 6항에 따라 보험금은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보험사의 통보를 받는 기분이 들 것이다. 물론 서류에는 ‘약관 설명을 들었으며 내용에 동의합니다’라는 자필 서명이 남아있을 터.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약관을 꼼꼼히 곱새기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은 약관 설명을 아예 듣지 못했다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이다.

아마 이런 사정 때문에 ‘림보’라는 개념이 등장했을 것 같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크리스트교 공식 교리에도 없다. 하지만 ‘지옥 문턱에 림보라는 썩 괜찮은 공간이 있다’는 믿음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전승되며, 단테도 <신곡>에 림보에 모인 위인들의 면면을 늘어놓았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죄 없이 살고 착한 일을 많이 했어도 교회 ‘회원권’을 끊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 너무 옛날에 태어나 교회가 생기기 전에 살았거나, 크리스트교 문화권과 너무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던 사람, 또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갓난아기들 말이다. 이 사람들은 크리스트교의 규정상 천국에는 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죄도 짓지 않았는데 악당들과 나란히 지옥불 통구이가 되는 것도 불공평하다.

이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 림보다. 림보라는 이름부터 ‘경계선, 가장자리’를 뜻하는 라틴어 림부스(limbus)에서 왔다. 천국과 유일한 차이라면 림보에는 크리스트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랄까. 설명을 적다 보니 “천국보다 림보가 근사해 보인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경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옥이라고는 해도 림보는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가는 곳이 아니다. 게다가 교황청의 해석도 요즘 달라졌다. 어지간하면 림보가 아니라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림보 가기가 천국 입시보다 어려워지는 걸까.

사실은 “내가 갈 곳이 천국이냐 지옥이냐” 마음 졸이며 사는 일도 피곤하다. ‘종신 입시생’으로 사는 셈이니까. 그런데 마침 우리 ‘헬조선’에는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천국에 살기 원한다면 평생 지옥에 살 듯 살아야 한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나는 천국 주민일까, 지옥 주민일까? 알쏭달쏭하다.

김태권(지옥 여행을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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