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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22 09:15 수정 : 2019.08.22 21:58

게티이미지뱅크

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⑭

글쓰기 최고의 적은 스트레스
대통령 연설문 쓰면서 압박 심해
슬럼프나 마감 시간도 적
결과보다 글 쓰는 과정 중요

게티이미지뱅크

신입사원 시절 일곱 살 연하인, 나보다 6개월 입사 선배에게 사사건건 지적을 받았다. 이를 못 견디고 당시 신혼이던 아내에게 울면서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열두번 사표를 썼다. 직장생활 25년 동안 평균 한 해 걸러 사직서를 쓴 셈이다.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글쓰기 최고의 적, 스트레스 앞에 무력하다. 스트레스는 글 쓰는 사람의 숙명이고, 글은 스트레스를 쥐어짠 즙과 같다. 지속적으로 쓰려면 어려움, 실패를 이겨내는 힘이 필요하다. 글쓰기는 실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한 문장 잘 쓰고 다섯 문장, 열 문장 실망하는 과정이다.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스트레스를 견뎌내야 한다. 이길 순 없지만, 벗어날 수도 없지만,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 계속 쓸 수 있다.

스트레스의 가장 큰 주범은 완벽주의다. 가뜩이나 새가슴인 내가 대통령 연설문을 쓰면서 스트레스 압박이 심해졌다. 나의 글쓰기 여정은 스트레스와 싸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금 이 시각도 주문을 외운다. 종교인이 밥 먹기 전에 하는 기도, 아니 발원과 같다. 스트레스와의 동거를 위한 자기암시이다.

“나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써낸 결과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쓰지 못하고 끙끙 앓는 시간도 소중하다. 이 또한 글 쓰는 시간이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 지금 쓰는 글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을지 모르지만, 혹시 내 글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잘 보이려 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본다. 남보다 잘 쓰려고도 말자. 내가 이전에 쓴 것보다 잘 쓰면 된다. 못 쓰면 또 어떠랴. 너무 완벽한 인간은 밥맛없다. 완벽하게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 나는 인간적일 때 가장 매력적이다. 무너지고 상처받고 다시 일어서며 쓰련다. 생채기 딱지를 덕지덕지 붙여가며 하루하루 쓸 것이다.”

스트레스는 내게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심해진다. 나는 상황을 내가 제어하고 결정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쓸 수 있는 만큼만 쓴다. 쓰기 싫으면 언제라도 그만둔다. 내 뜻대로 할 수 없을 때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지금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천하의 명문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쓸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자. 이렇게 쓰다 죽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나아가, 상황이 어떠하든 글 안에서 나는 자유다. 글은 내가 정한다. 내가 해석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듯’, 아무것도 아닌 것도 내가 쓰는 순간 그 무엇이 된다. 의미는 내가 만든다.

스트레스와 함께, 글쓰기의 또 하나의 적은 슬럼프다. 스트레스가 쓰는 동안 그때그때 부딪치는 걸림돌이라면 슬럼프는 장기간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장벽이다. 일정 기간을 통째로 앗아간다. 그래서 더 심각하다. 글쓰기 강의에서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도 슬럼프에 관한 것이다. 글을 쓰기 싫어졌어요. 글 쓰는 일이 벽에 부딪힌 느낌이에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요?

글쓰기 슬럼프, 즉 벽에 부딪히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소진이고, 다른 하나는 과잉이다. 가진 게 없어도 못 쓰고 가진 게 너무 많아도 못 쓴다.

가진 게 다 떨어진 경우는 쓰기를 멈추거나 쓰면서 채워야 한다. 공부를 더 하든 경험을 더 하든. 작가들은 길게 보고 총량을 관리한다고 한다. 가진 것을 단박에 쏟아내지 않고 계획을 세워 써나가고, 연료가 다 떨어져 시동이 안 걸리는 일이 없도록 가진 게 떨어질 만하면 미리 충전해가며 쓴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쓴 책과 기고 글에서 내가 겪은 경험을 모두 소진해버렸다. 개그맨이 토크쇼에 나와 같은 일화 우려먹듯 고장 난 녹음기가 될 처지에 놓였다. 고민이다.

가진 게 너무 많아 못 쓰는 경우도 있다. 방에 물건이 너무 많아도 찾기가 어렵다. 차가 많으면 도로가 정체된다. 실타래가 복잡하게 엉켜 있으면 풀기 어렵다. 가진 게 많으면 스스로 기대와 검열 수준도 높다. 다행히 나는 가진 게 별로 없다. 기준점도 낮다. 올라갈 일만 남았다. 가진 게 느는 것만큼 이익이다. 대신 나는 차이에 민감하다. 어제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메모한 것의 미세한 발전을 알아챈다. 그럴 때 기쁘다. 스스로 대견하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슬럼프는 쓰는 이유나 목적에 회의가 들 때에도 온다. 블로그에 아무도 공감을 눌러주지 않는다든가, 내 글의 수준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지금 뭐 하러 이 일을 하고 있는지 회의에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게는 아직 내가 알지 못한 재능, 내가 알고 있지만 보여주지 못한 내용이 숨어 있을 거야. 그것은 써야만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어. 언젠가 보여줄 날이 반드시 올 거야. 아마 사람들이 깜짝 놀랄걸? 그때까지는 스스로 인정하고 감탄하는 수밖에, 참고 기다릴밖에. 분명한 건 지금 안 써진다고 내일도 안 써진다는 법은 없다는 사실이야. 시를 못 쓴다고 소설까지 못 쓰란 법도 없지.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내가 못 쓰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야. 글쓰기에 정해진 법은 없어. 나는 앞으로 글로써 이룰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해. 글쓰기 책을 10권 쓰고 글쓰기 학교를 열거야.

시간도 글쓰기 적이다. 그놈의 마감 시간 때문에 힘들다. 쓰고 싶은 때 아무 때나 쓰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의 적을 물리치는 나만의 방법은 이런 것이다.

첫째, 마감시한을 오히려 활용한다. 나는 마감이 없으면 글이 안 써진다. 시험이 없으면 공부하기 싫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쓴 글쓰기 책 모두, 연재를 자청한 후 마감에 쫓겨 쓴 글을 모아 출간했다. 독자 반응을 미리 확인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마감 강박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 글 역시 오늘 밤까지 써야 하기 때문에 지금 쓰고 있다. 마감이 임박해 쓰면 장점이 있다. 벼락치기 상황이 되면 내 뇌가 최악만 면하자는 절박감 속에서 잘 써야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위기의식은 한껏 고조시킨다. 직관을 동원하여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최대한 끄집어낸다. 아니 내 뇌는 써야 할 글이 생겼을 때부터 걱정과 불안 속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내가 언제까지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혼자서 쓰고 있다. 그것이 마감 직전 나온다. 이렇게 마감시한에 쫓겨 쓰면 계획을 세워 조금씩 써나가는 것보다 결과물이 더 좋을 수도 있다. 단점은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좋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글이 잘 써지는 시간대에 쓴다. 나는 심야보다는 새벽녘에 잘 써진다. 바쁘고 기쁠 때보다는 심심하고 우울할 때 잘 써진다. 조용한 곳보다는 약간 소음이 있는 곳, 혼자 있을 때보다는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 잘 써진다. 또한 글을 써야 하는 시간보다 안 써도 되는 시간에 더 잘 써진다. 그래서 끼적거리고 메모하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모은 것을 글을 써야 할 때 써먹는다.

셋째, 시간을 제약하고 쓴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혹은 스톱워치를 켜놓고 10분, 20분 안에 글을 쓴다. 내가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데 효과적이다. 일종의 자동기술 글쓰기다.

사실, 시간은 내게 글쓰기 최대 응원군이다. 나같이 순발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시간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재능이 없어도 시간만 들이면 언젠가 써지는 게 글이니까 말이다.

분량도 만만치 않은 글쓰기 장애물이다. 원하는 만큼 쓰라 하면 못 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 줄만 써도 되고 하고 싶은 말 다 써도 된다고 하면 글쓰기가 무에 어렵겠는가. 글쓰기는 분량 제한이 있다. 요구하는 분량만큼 쓰기가 어렵다. 길게 쓰기도, 짧게 쓰기도 어렵다.

내가 즐겨 쓰는 분량 늘리기 수법이다. △구체적으로 쓴다. △인용한다. △부연 설명한다. △상세히 묘사한다. △사례, 예시를 든다. △육하원칙, 오감 등에서 빠진 것을 찾아 넣는다. △범위를 확장한다. △대화체 내용을 집어넣는다. △내 주장과 반대되는 내용을 소개한다. △열거 가짓수를 늘린다.

짧게 줄이는 방법은 세 가지다. △꼭 하고 싶은 말 한 줄에서 출발해 늘려가다 정해진 분량이 되면 글쓰기를 마친다. 보태기 방식이다. △정해진 분량 안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문장을 띄엄띄엄 배치한 후 그 아래 공간을 채운다. 한장짜리 보고서를 써야 하는 경우, 한장 안에 넣고 싶은 핵심 문장을 4~5개 쓴 후 여백을 메우는 방식으로 작성한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써놓고 정해진 분량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줄이는 방식이다.

이 글을 시작할 때 ‘글쓰기 5적’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분량이 다 찼다. ‘4적’으로 바꿨다. 내 마음이다. 내가 정한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글쓰기 적들과 싸운다.

강원국(<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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