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18 09:57
수정 : 2019.07.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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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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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회의 사람 참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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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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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탄 아내가 화가 잔뜩 나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다. 기사가 한남대교를 시속 120㎞로 달리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성격이 급한 나는 당장 전화기를 잡고 영수증에 찍힌 택시 회사로 전화를 걸 채비를 했다. 내 아내에게 욕을 했다고? 그럴 경우 나는 절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아내는 나를 만류하며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당신에게 욕을 한 택시 기사에게 따져야겠다고 말하니, 아내는 기사가 자신에게 직접 욕을 한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기사가 아내에게 욕을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나름의 분노를 쏟아냈다. 특정 정치인, 택시운송사업 정책, 깜빡이를 켜지 않고 끼어드는 옆 차, 주정차 금지 구역에서 차선을 막고 서 있는 영업 차량 등, 도로와 세상에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다. 세상을 향한 그의 분노에 가림막 하나 없이 노출된 아내는 집에 와서도 열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기사님께 조용히 좀 해달라고 그러지 그랬어”라고 말했다. 아내가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몰라.”
아내가 나를 ‘유노 낫씽’ 존 스노우(미국 홈박스오피스의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여자 등장인물 이그리트는 자신의 애정을 알아채지 못하는 주인공 존 스노우에게 ‘넌 아무것도 몰라’라고 말한다)로 만들어버린 이유는 나 역시 거리에 나서면 똑같기 때문이다. 집 근처인 지하철 안국역에서 차를 몰고 용산 방향으로 장을 보러 갈 때면 광화문 삼거리를 지나는데, 주말이면 각종 행사와 집회로 꽤 자주 좌회전이 금지된다. 좌회전을 못 해 먼 거리를 돌아가는 날이면 나는 차 안에서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도로를 주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평불만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결국은 욕설을 내뱉는 지경에 이르는 적도 있다. 거리에 정차한 관광버스를 욕하고, 끼어드는 옆 차를 욕하고, 서울시의 교통 정책을 욕한다. 그럴 때면 아내는 말한다. “여기에 우리 둘밖에 없는데, 자기가 욕하면 누가 들어? 그 사람들이 들어? 내가 듣잖아.”
나 역시 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을 경험한 적이 있다. 요새 유행하는 콩나물 모양의 무선 이어폰을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보다 한층 흥겨운 마음으로 음악을 들으며 출근을 하던 날이었다. 지하철에서 함께 탄 50대가량의 남성이 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음악에 몰입을 방해하는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지하철의 다른 칸으로 피하려는 찰나에 비슷한 또래의 남성이 대거리를 시작했다. “이놈아 떠들려면 네 집에 가서 떠들어!” 두 사람의 싸움은 결국 “나이도 어린놈이”를 거쳐 “주민증 까봐”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슬슬 피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두 량을 건너가야 했다.
아내에게 화를 낸 택시 기사님, 지하철의 전도자 아저씨, 지하철의 전도자 아저씨와 싸운 아저씨 그리고 나는 모두 항성이다. 격한 감정의 직사광선을 자체적으로 생성해낸다는 의미에서 항성이다. 내가 택시를 운전한다면 어떤 택시 기사가 될까? 서울의 복잡한 도로를 아무런 분노도 없이 달릴 수 있을까? 내가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어떤 종교인이 될까? 미개한 불신자들로 가득 찬 이 거리에서 큰소리를 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우리는 서로의 위치를 바꿔놓더라도 싸우며 고함을 칠 것이다. 한 기자 선배는 “택시 기사가 정치 이야기를 계속하니까 남편이 ‘아저씨, 조용히 좀 해주세요’라고 면박을 줬다”며 “나 혼자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말했다. 단언컨대 택시 기사도, 선배의 남편도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항성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긴장하거나 괴로워한다. 괴로운 사람이 분노를 피하는 법을 익힐 필요는 없다. 화가 많은 사람이 화를 삭이는 게 맞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으며 살기란 또 얼마나 힘든가?
금융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는 거래처와 통화를 할 때면 사무실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업무 중에 걸려오는 전화들이 흥겹고 정다운 이야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 상사가 전화 통화하면서 화내는 걸 보면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다”라며 “내가 화내는 모습은 동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무실에서 전화로 취재원과 호통을 치며 싸우던 나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20년 지기 친구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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