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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2 19:57 수정 : 2019.06.12 20:07

일러스트 윤수훈

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출근 마지막 날 회사 앞 카페
김금희 작가 소설 읽고 내 처지 생각

눈치 보며 사무실 책상 정리
친한 형 전화로 ‘비만 유전자’ 얘기

괴롭혔던 팀장 “얼른 가” 소리 반가워
뜻밖에 마음앓이로 열흘간 집 밖 못 나간 나

일러스트 윤수훈

출근 마지막 날, 나는 아침 일곱시쯤 회사 앞 카페에 도착했다. 당장 급한 원고 마감이 없음에도 습관적으로 일찍 눈이 떠졌다. 나는 집에서 들고 온 김금희의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를 꺼내 읽었다. 나오자마자 사서 이미 몇 번이고 읽었던 책이었음에도 굳이 퇴사하는 날에 들고 온 것은 소설 속 많은 인물의 상황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표제작 <너무 한낮의 연애> 속 주인공 필용이 좌천의 개념으로 발령받은 팀의 이름이 바로 ‘시설관리팀’이었다. 팀에서 그가 하는 일이 지금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과 거의 같은 걸 보고 괜히 웃음이 나왔다. 필용의 대학 시절 사랑이기도 한 양희는 서른몇 살이 된 지금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연극 같은 걸 하고 있네? 예술이, 꿈이 뭐라고……. 생각을 하다가 아이고 세상에, 이건 나잖아? 거의 시시티브이(CCTV)로 나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단편 서너 편을 읽고 나니 얼추 출근할 시간이 되었다.

기계적으로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은 나는 그러나 더 이상 내게 주어진 업무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왠지 눈치가 보여 (심지어 이전에는 누구보다 눈치를 보지 않고 딴짓을 해놓고서는) 뭔가 부산한 것처럼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간 부지런히 짐을 옮겨둔 탓에 안에 든 것이라고는 (비품 창고에서 훔쳐온) 네임펜 한 박스, 그리고 유에스비(USB) 포트에 연결해서 쓰는 탁상용 선풍기뿐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김금희 선배가 내게 수상을 축하한다며 건네준 선물이었다. 꼭 두 번의 여름을 이 연어색 선풍기로 시원하게 보냈지. 선배의 소설은 왜 선배처럼 다정할까. 아니 선배는 왜 선배의 소설처럼 다정할까. 나는 그다지 다정하지 못한 사람인데 이토록 다정한 소설을 쓰긴 틀린 걸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물건들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이젠 뭘 하지 싶은데 마침 친한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언제나처럼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은 채 화장실을 가는 것처럼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와 복도의 끄트머리로 뛰어갔다. 뭔가 웃긴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오전 뜬금없는 시간에 형의 전화는 언제나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까. 끊어질 듯 절대 끊어지지 않는 전화를 붙들고 나는 보일러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행여나 끊길까 봐 두려워 얼른 전화를 받아 대답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다급하게 보일러실 오토 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지난 3년 동안 나의 은밀한 전화 부스(?)가 되어준 이곳. 형은 익숙한 듯 또 보일러실이냐, 물어보았고 나는 다급히 문을 닫았다. 커다란 산업용 보일러 뒤편에는 대회의실에서 내가 몰래 꿍쳐놓은 접이식 의자가 걸쳐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펼치고 앉았다. 대학 동기인 형은 4학년 2학기,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격무와 잦은 야근, 높은 연봉으로 유명한 회사에 합격해 동기들 모두의 축하를 받았는데, 입사 3개월 때부터 때려치우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입사 7년 차가 된 지금까지도 멀쩡히 잘만 다니고 있다. 형은 내게 웃긴 일이 생겼다고 운을 떼며, 내가 요즘 쓰는 에세이에 딱 맞는다며 얘기를 했다. 요즘 부쩍 살이 찐다 싶었는데 정기 신체검사를 받은 결과 경도비만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제공하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정말 다양한 검사와 전문적인 분석, 동기부여를 해준다고 했다. 그중 백미는 유전자 검사였다.

“내가 살이 잘 찌고 요요가 잘 오는 체질이래. 그게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에 정해져 있대.”

그것을 판별하는 데 굳이 유전자 검사까지 필요할까 싶기는 했지만, 나는 맞장구를 치며 신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 같은 문외한이 얼핏 듣기에는 마치 타로점이나 사주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비만 유전자 검사는 자세히 뜯어보니 꽤나 그럴듯한 의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체내 지방 수용성, 운동 반응성, 근육 형성의 정도 같은 것들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에 다 기록되어 있어서 해당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들을 확률적으로 계산해보면 생애 주기에 따라 어떤 몸무게를 가지고 어떤 체형을 가지게 될지 알 수 있다는 거였다. 형의 경우 짠 것을 좋아하는 입맛을 타고난 대신(짠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트륨에 대한 혈압의 반응도가 낮고, 탄수화물 분해가 빠르고 지방 저장이 활발한 대신 운동 반응성 또한 높다고 했다. 즉, 많이 먹고 많이 찌고, 또 많이 운동을 하며 살을 빼도 요요현상 때문에 고생하며 평생 다이어트와 요요를 반복할 팔자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함께 웃으며 그래 우리 죽도록 먹고 운동하고 그냥 뚱뚱한 채로 살자, 라는 결론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의자를 접으며 이것을 대회의실에 가져다 놓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앞으로 누군가 나처럼 사무실에서 일분일초라도 도망쳐 있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아니, 어쩌면 직장에 다니고 있는 모두에게 이런 의자 하나쯤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나답지 않게 이타적이며 센티멘털한 감상에도 빠지며, 마지막으로 보일러실 문을 닫았다.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 반장은 박 대리 이거 어떻게 하는 것이냐 돋보기를 쓴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형태소 단위의 질문을 쏟아냈고, 내 자리에는 급한 회신을 요구하는 쪽지가 한가득 붙어 있었다. 한숨을 쉬고 일을 처리하려 하는데 갑자기 나를 호출하는 팀장. 자리 근처로 다가가자 나의 출신 대학과 학과를 물었다. 순순히 대답하자 수시인지, 정시인지 수능 성적이 얼마나 나왔는지, 입시전형은 어떠했고, 현재 토익점수가 몇 점이나 나오는지까지 입학사정관처럼 묻기에, 이 아저씨가 또 왜 이러시나 했는데. 알고 보니 첫째 아들이 현재 고3이며 한창 수시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원서를 도통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데, 뭐 어쩌라는 걸까. 결국 나는 “팀장님 제가 대학 들어간 지 13년이 지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팀장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그렇지, 옛날 일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돌아가는 내 등에 대고 팀장이 갑자기 외쳤다.

“박 대리 빨리 집에 가.”

“네?”

“마지막 날인데 뭘 삐대고 있어. 얼른 가.”

“지금요?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지. 얼른 가.”

나는 입꼬리에서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은 채, 가방을 둘러메고 사무실의 다수를 향해 고개를 숙여 외쳤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나와 굉장한 친교를 유지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한마디씩 덕담을 얹었고, 심지어는 조금 전까지 쥐 잡듯 나를 잡던 김 반장조차도 이어지는 질문을 거둔 채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의 삶을 응원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청소년 드라마적 결론이람. 그래도 참 좋구먼, 생각하며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자꾸만 빨라지는 발걸음을 늦추기 위해 노력하며 인사팀으로 가 최대한 차분하게 서류에 사인을 하고 사원증 반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열한시가 조금 넘은 시간. 뙤약볕이 내 정수리를 비추고 있었고, 이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했던 시간, 너무 한낮의 퇴사가 아닌가. 원래는 저녁쯤 퇴근해 근처의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술이나 한잔하고 들어가려 했는데 갑자기 시간이 붕 뜨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제야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아무런 소속 없이,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이 시간에 거리에 서 있다는 것을 절감했고, 그것은 무척 생경한 감각이었다. 결국 내가 향한 곳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집. 가방이 무겁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그렇게 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풀어헤친 나는 일단 입고 있던 감탄팬츠를 벗었다. 가랑이 부분이 쓸려 구멍이 나기 직전이라 바지째로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이제 다시 입을 일도 없는 바지였다. 셔츠를 벗어 빨래통에 집어넣고 탁상용 선풍기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회사에서 꿍쳐 온 네임펜이며 포스트잇 같은 것을 책상 서랍에 넣어 놓고 나니 괜히 마음이 허했다. 뭔가를 시켜 먹을까 하다가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아주 오랜만에 이 시간에 집에 있어 보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근사한 저녁을 먹고, 간단히 산책을 하자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꼬박 열흘 동안 나는 집 밖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잠을 자도 계속해서 잠이 왔다. 깨고 나면 티브이를 틀었고, 배가 고파졌고 핸드폰으로 아무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었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졌고, 막 이별을 한 사람처럼 앓았다. 퇴사하기 전 내가 꿈꿨던, 매일 운동을 하고, 건설적으로 책을 읽고 생산적으로 글을 쓰며, 하다못해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롯이 잠을 자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내가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욱 악화된 생활습관.

그러다 문득 내가 떠올린 한 장면. 철이 바뀔 때마다, 인생의 고난이 닥칠 때마다 회사를 마치고 온 엄마는 가방을 던져 놓은 채 누워 있곤 했었다. 그저 멍하니 드라마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어쩌면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나는, 어쩌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내 유전자에 새겨진 어떠한 것들을 풀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기필코 내일은 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말리라 마음먹으며, 나는 굶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또다시.

박상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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