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24 20:25
수정 : 2019.04.2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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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7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와 기아 타이거즈의 경기. 연장 10회말 롯데 손아섭이 1사 1루 상황에서 끝내기 투런홈런을 친 후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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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회의 사람 참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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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7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와 기아 타이거즈의 경기. 연장 10회말 롯데 손아섭이 1사 1루 상황에서 끝내기 투런홈런을 친 후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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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제일 큰 노래방은 동래구 사직동에 있는 사직노래방이다. 이 노래방의 지정 애창곡은 ‘부산갈매기’다. 하루 평균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에 모여 목이 터져라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남았는데”라며 울부짖는다. 그러나 진정한 롯데 팬들은 알 것이다. 지나간 일들을 전부 가슴에 남겨서는 안 된다. 진 경기는 깨끗하게 잊고 이긴 날만 가슴에 남겨야 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 이번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을 굳게 믿고 있는 내 친구는 항상 ‘큰 그림’을 얘기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롯데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큰 기쁨을 주기 위해 승리를 아끼며 우승을 미루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내가 ‘롯데 큰 그림’ 운운하면 분노의 눈빛을 보낸다. 롯데에 관한 농담은 롯데 팬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팀은 나만 깔 수 있다”는 게 스포츠팬의 철칙이다.
지난주, 나는 매우 복잡한 심정으로 토트넘 홋스퍼(이하 ‘토트넘’)와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의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경기를 봐야 했다. ‘김덕배’(맨시티의 공격수 케빈 더브라위너에게 한국 팬들이 붙여 준 애칭)에게 반해서 2015/16 시즌부터 맨시티의 팬이 된 나는 손흥민(토트넘)을 응원하는 보통의 한국 아저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흥민이가 한 골 정도 넣고, 결국 맨시티가 2점 차 정도로 이겨서 4강에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나와 비슷한 처지 때문에 욕을 먹은 방송인도 있다. 아프리카 티브이에서 인터넷 축구 중계방송을 하는 배우 출신 비제이(BJ) 강은비는 이날 맨시티를 응원했다는 이유로 3시간 동안 200통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결국 강은비는 이 영상을 삭제하고 ‘맨시티를 응원하는 모습이 불편하셨던 부분이 있으시다면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라는 내용의 사과문을 올려야 했다. 같은 맨시티 팬으로서 강은비의 순수한 ‘덕심’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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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의 아이린.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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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심은 쉽게 상처받는다. 직장 후배 중 하나는 10년 전부터 일본의 축구 선수 ‘혼다 케이스케’(멜버른 빅토리 에프시)의 팬이다. 혼다가 너무 좋아서 혼다를 닮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혼다를 닮은 남자와 결혼해 그 남자마저 혼다의 팬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이 후배는 ‘혼다가 왜 좋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밝혔다. 누군가는 ‘그런 말 좀 들었기로서니 설마 과장이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언컨대 아니다. 배우 류준열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를 개봉 첫날 관람하고 모든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또 다른 후배는 “류준열 별로지 않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지면에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표출한다. 진짜 팬들은 남들이 별생각 없이 내뱉는 한 마디에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진정한 덕심이란 좋아하는 대상의 흥망성쇠와 삶의 궤적을 일치시키는 고도의 감정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동질감이 얼마나 강한지를 볼 수 있는 좋은 예는 영국 축구 팬들이 겪는 임상적 우울 증세다. <텔레그래프>와 <가디언> 등의 보도를 보면 축구의 나라 영국에서는 자신이 지지하는 팀이 졌다는 이유로 극도의 우울 증상에 빠져 주말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팬들이 연고지 축구팀에 느끼는 동질감이 지나치게 커져 개인의 정신 건강과 사회에 위해를 끼친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있을 정도다. 뭔가의 팬이 된다는 건 그런 일이고 그래서 타인의 팬심을 이해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한편 덕심에는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특징이 있다. 혼다의 팬인 후배는 “월드컵 때 한 게시판에 혼다가 멋있다는 글이 잠깐 올라왔는데, 이상하게 싫었다”라며 “나만 아는 맛집이 방송 탄 기분”이라고 밝혔다. 레드벨벳의 아이린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누군가로부터 ‘아이린보다 사나가 더 좋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냐”고 묻자 “‘그래 너는 계속 사나 좋아해라’라고 말하면서도 아이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선민의식을 느낀다”고 밝혔다. 아이린의 팬인 친구는 큰 그림을 좋아하는 롯데 팬이기도 한데, “아이린이 엘지를 응원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아이린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도 좋아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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