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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8 14:02 수정 : 2019.04.18 19:47

클립아트코리아.

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감정 앞서는 이 불편해하는 우리 사회
그들은 조직에 문제 제기 많이 하는 이
감정 숨기면 병이 돼···글쓰기가 특효약
글쓰기엔 3가지 감정 다루는 기술 필요
그중 하나 “감정 목록 만들기”
회사 보고서에도 ‘표정’ 있어
‘표정’ 따라 상사 마음 움직여

클립아트코리아.
“어머니날이지만 엄마가 고맙기는커녕 밉다. 보고 싶어 밉다.” 초등학교 3학년 ‘어머니날’에 쓴 글의 일부다. 이 글을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읽어주셨다. 읽다가 우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개월 후 맞은 5월8일 어머니날이었다.

‘우리가 감정을 드러내면 호들갑스럽다고 한다. 우리가 반박하면 불안정하다고 하고, 우리가 화를 내면 신경질적이라거나, 이성적이지 못하다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미쳤다고 한다.’

요즘 관심을 끌고 있는 스포츠 용품회사의 광고 문안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이다. 과연 여성뿐일까. 남성은 예외일까. 아니다. 우리 모두다. 우리 사회는 감성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에게 ‘저 친구는 감정적이야’ ‘당신은 왜 그렇게 감정이 앞서?’라는 낙인을 찍는다. 과연 이게 온당한가.

인간은 감정이 먼저다. 감정이 앞서야 정상이다. 이성(異性)을 만나면 사귈지 말지는 이성(理性)이 결정하지 않는다. 느낌, 감정, 직감이 판단한다. 이성은 결정된 사항을 설명할 뿐이라고 한다. 만나기로 했으면 왜 만나는지,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으면 왜 그런지 이유를 댈 뿐이다. 뇌의 감성 부위가 망가지면 결정 자체를 못하지만, 이성 부위에 문제가 생기면 결정은 하는데,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사회는 이성을 요구한다. 관계가 중요하다. 이성으로 감정을 잘 덮고 포장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감정이 메마르고 냉철한 사람이 대접받는다. 그런 지성인(?)이 득세한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정을 허용하면 높은 사람이 불편하다. 싫어도 그 앞에서 씩 웃어줘야 윗분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입안의 혀처럼 놀고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 자기감정에 충실하면 고분고분하지 않다.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관계를 우선해서 감정을 잘 감추고 억제하면 그게 인격이다. 그래야 수양이 잘 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슬픔, 그리움, 불쌍함 등을 잘 느끼는 사람, 즉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죽기 살기로 조직에 매달리지 않는다. 눈을 반들반들 뜬 채 어떻게 하면 이 조직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애면글면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감성 세계가 있다. 윗사람이 볼 때는 조직을 향한 애정과 일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된다.

자칫하면 화가 나서 대들 수도 있다. 상사에게 혹은 조직에 격분할 수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왜 없겠는가. 아니 사회에 반기를 들 수도 있다. 이런 바탕에는 감정이 있다. 안정(?)을 원하는 조직 입장에서는 예측이 안 되고 혼란스러운 존재이다. 매사 예민하고 부정적인 여론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프로 불편러’다. 한마디로 부려먹기 힘들다. 당연히 반길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상사들도 할 말 하면서 살고 싶다. 그런데 참고 살았다. 남의 감정에 맞춰주며 살았다. 생각해보니 억울하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저 친구는 나 같지 않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그런 친구가 괘씸하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숨기면 병이 된다.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는 감정 치유의 힘이 있다. 내 감정에 관해 써보자. 여러 이유로 감정이 정리된다. 우선 감정에 관해 쓰면 그 감정이 남의 일같이 된다. 누군가 내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면 이렇게 반응하지 않는가. ‘뭐 그런 것 갖고 그래. 별일도 아니구먼.’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정리한다. 글을 쓰면 자신의 일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정리한다. 바둑이나 장기를 옆에서 지켜보면 잘 보이는 것과 같다.

내가 가장 많이 시달리는 감정은 걱정과 후회다. 걱정하는 일이 있으면 일어날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로 구분한다. 일어나지 않을 일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일어날 일도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로 나뉜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 당할 수밖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준비하고 연습하면 된다.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도 마찬가지다. 역량이 안 돼서 못 했으면 잘한 일이다. 역량이 되는데도 놓쳤다면 그 기회는 다시 온다.

우리 뇌는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 있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빌미만 주면 벗어날 준비가 돼 있다. 다만,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남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미워하고 경계해야 생존에 유리하다.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방어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 미운 감정에 관해 글을 쓰면 ‘이만하면 됐다. 그만 미워하자’면서 미움이란 감정에서 빠져나온다. 미국의 심리학자 페니 베이커가 연구한 결과도 있다. 두 그룹에게 일기를 쓰게 했는데, 한 그룹에는 그날 한 일을, 다른 그룹에는 그날 느낀 감정을 쓰라고 했다. 한 일을 쓴 그룹은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으나, 감정을 쓴 그룹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훨씬 건강해졌다. 글을 쓰면서 부정적인 감정에서 헤어난 것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도 감정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글쓰기에는 세 가지 감정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첫째는 마음 다스리기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 다시 말해 마음 근육이 단단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쓸 수 있다. 글쓰기는 회복탄력성과 만족 지연능력과 같은 마음 근력을 요구한다. 글은 쓰다 보면 막힌다. 이때 의기소침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는 계속 쓸 수 없다. ‘쓰다 보면 그럴 수 있지, 내 실력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쓰다 보면 써지겠지’하며 훌훌 털고 다시 자판을 두드릴 수 있어야 한다. 독자와의 관계에서도 이런 회복 탄력성이 필요하다. 글은 독자의 평가를 받는다. 지적받고 혹평에 시달릴 때, ‘그건 당신 생각이지’, 혹은 ‘그래, 별거 아니니 받아줄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에 휘둘려 일희일비하거나 독자가 무서워서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만족 지연능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글은 누구나 쓰기 싫다. 참고 견뎌야 한다. 글이 써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궁둥이를 붙이고 있어야 쓸 수 있다. 하기 싫고 재미도 없지만, 글로써 이룰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며 앉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며 버텨야 가능한 게 글쓰기다.

두 번째는 기분이다. 기분은 글쓰기 환경이다. 사람에 따라 글이 잘 써지는 기분 상태가 있다. 들떠 있을 때보다는 우울한 때, 정신없이 바쁠 때보다는 심심할 때, 사람들과 어울릴 때보다는 외로울 때 글이 잘 써진다. 화가 날 때, 사랑에 빠져 있을 때도 잘 써진다. 나는 슬플 때, 화날 때, 괴로울 때 글이 잘 써진다. 누구나 글이 잘 써지는 기분 상태가 있다.

학창시절 대자보를 보면 불끈했다. 아마도 그 글을 쓴 친구가 불끈한 상태에서 썼을 것이다. 하물며 회사 보고서에도 표정이 있다. 보고서를 쓴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싶은 열의가 얼마나 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느 만큼인지 글에서 읽힌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안 하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상태에서 썼다는 게 느껴질 때 상사 마음도 움직인다.

글은 권태, 불안, 긴장, 슬픔, 우울, 외로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 상태에서 더 잘 나온다고 한다. 글 쓰는 사람에겐 얼마나 다행인가. 좋은 감정일 때는 그것을 즐기고, 나쁜 감정에서는 글을 쓰면 되니 말이다. 단, 하나 필요한 게 있다. 맷집이다. 밀려오는 슬픔, 분노, 실패, 배신, 상실, 우울,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로부터 도망가지 않는 것이다. 마주하고 맞부딪치는 것이다. 이길 수는 없지만 참고 견뎌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쓸 수 있다.

세 번째는 그야말로 감정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서, 감성이다. 이는 글쓰기의 재료다. 글이 사실과 느낌의 조합이라고 할 때, 그 한 축인 느낌에 해당한다. 글에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담긴다. 글에 들어가는 감정에는 크게 네 범주가 있다. 걱정, 근심, 고민 등 미래에 관한 것, 불평, 불만, 분노 등 현재에 관한 것, 후회, 회한, 반성 등 과거에 관한 것, 그리고 미움, 시기, 질투 등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감정목록 만들기를 권한다. 글에 쓸 수 있는 감정목록을 적어두고 글을 쓸 때마다 한 번씩 훑어보는 것이다. 미움, 걱정, 불안, 두려움, 후회, 열등감, 분노, 놀람, 슬픔, 비참함, 고마움, 불쌍함, 갈등, 부끄러움, 당황스러움, 만족감, 기쁨, 흥분, 의심, 시기심, 거부감, 사랑, 초조함, 실망감, 안도감, 짜증, 우쭐함, 외로움, 욕심, 울분, 절실함, 죄책감, 좌절감, 역겨움 등등. 나도 내 감정을 잘 모른다. 그래서 감정목록을 만들어놓고 글을 쓸 때마다 들여다본다. 어떤 감정을 내 글에 녹여 넣을 것인지.

기업에서 회장 연설문을 쓸 때다. 회장 부인께서 큰 상을 받았는데, 그 상은 남편이 축사하는 게 관례다. 그런데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축사를 잘 써서 화해시켜드리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회장님 부인 눈가를 촉촉하게 해야 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축사를 읽다가 회장이 울었다.

강원국(<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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