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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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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읽기와 듣기는 소유 행위
쓰기와 말하기는 공유 행위
공유는 공감에서 출발
공감 수준이 글의 질 결정
최근 우리 사회 공감 능력 떨어져
글쓰기, 공감 능력 높이는 데 효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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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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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일 티브이(TV)만 봤어.”
고교 다닐 적 기말고사를 앞둔 월요일,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실은 공부했다. 나름 친구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일요일에 공부하지 않고 놀았다며 속상해했기 때문이다. 배려였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웅숭깊지 않다. 분명히 이 말에는 친구를 방심하게 할 속셈이 들어 있었다.
학창시절, 노트 필기를 예쁘게 하는 친구가 있다. 오색찬란하게 노트를 꾸미는 데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시험 성적은 신통치 않다. 시험을 잘 치는 건 나처럼 그 노트를 빌려 간 친구다. 나는 필기할 시간에 선생님 말씀에 집중했다. 그럼 그 친구는 왜 그렇게 노트 필기에 공력을 들였을까. 분명 누군가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나 같은 친구가 한두 명쯤은 꼭 빌려 가기 때문이다. 읽기와 듣기는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소유 행위다. 쓰기와 말하기는 내 것을 남에게 나눠주는 공유 행위다. 이 친구는 공유를 즐긴 것이다.
공유는 공감에서 출발한다.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맹자는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했다. 맹자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안돼 보이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우리 뇌의 거울신경세포 작용 덕분이다. 어린아이는 엄마가 울면 따라 운다. 5살 어린아이도 두 손에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이 문 앞에서 쩔쩔매고 있으면 얼른 가서 문을 열어준다고 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감정이입과 역지사지를 가능하게 하는 공감 회로를 갖고 태어난다.
공감 능력에도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연민’이다. 딱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긴다. 다음은 ‘구제’이다. 힘든 사정을 외면하지 않고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베푼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사회적, 구조적 차원이 된다. ‘정의감’이 바로 그것이다. 제도적으로 보다 근본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사람에 따라 길거리 노숙자를 보고 불결하다고 피해갈 수 있고, 딱하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줄 수도 있으며, 다만 얼마라도 적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숙인 쉼터나 무료급식에 관한 국가 대책을 촉구할 수도 있다.
학급에 이런 친구 한명 정도 있지 않은가. 성적이 나온 날, 집에 가서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엄마를 찾는다. 엄마가 무슨 일이냐며 휘둥그레 묻는다. “엄마, 우리 반에서 전교 1등 나왔어.”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자식을 보며 엄마는 복장이 터진다. ‘너는 몇 등인데?’ 엄마를 속 터지게 하는 이런 친구야말로 공감력의 화신이다. 전교 1등에게 완벽하게 감정이입이 되고 역지사지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반의 영광이 나의 광영이요, 기쁨인 것이다. 자기 반과 자신을 일체화한다. 이런 친구는 사회에 나가서도 조직이나 나라가 어려워지면 뭔가 도움이 되려고 팔을 걷어붙인다. 오지랖이 넓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쓰기는 대상에 대한 공감의 과정이다. 그 결과물이 글이다. 사람에, 사물에, 사건에, 삶에 공감하는 정도가 글의 수준을 결정한다. 시인은 대추 한 알과 연탄재에 공감한다. 소설가는 성웅 이순신이나 ‘82년생 김지영’이 되기도 한다. 독자가 공감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대상에 빙의 돼야 한다. 독자를 대신해 글 쓰는 대상을 보고 쓰는 게 글이기 때문이다. 또한 글은 독자를 향한 공감의 산물이기도 하다. 독자의 심정과 사정을 읽고 그것을 건드려야 좋은 글이다. 그런 글을 읽은 독자는 공감이 간다고 말한다. 하물며 보고서 하나를 잘 쓰려 해도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상사의 입장과 처지를 읽고 써야 그의 마음에 드는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는 독자와의 대화이다. 글은 썼다고 끝난 게 아니다. 독자의 반응까지가 글의 완성이다. 공감력 있는 필자는 독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쓴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을까, 무엇을 궁금해할까, 이렇게 쓰면 독자가 알아먹을까, 재밌어할까, 지루해하진 않을까. 이런 질문에 관한 독자의 대답을 상상하며 쓴다. 그런 필자는 리액션이 좋은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공감력이 부족한 필자는 벽에 대고 말하거나 무표정한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글감도 생각나지 않을뿐더러 좋은 글을 쓰기도 어렵다.
조직에서 공감 능력과 인사고과는 음의 상관관계다. 공감 능력이 좋을수록 인사고과는 좋지 않다. 왜 그럴까. 내일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치자. 동료가 퇴근 후에 술 한잔하자고 한다. “안 돼. 상사가 지시한 일이 있어.” 이렇게 단칼에 거절하는 친구와 “무슨 일 있어? 내일까지 해야 할 일이 있긴 한데…. 그럼 딱 맥주 한 잔만 할까?” 동료 얘기가 궁금해 따라나서는,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는 친구. 누가 인사고과를 잘 받을 것인지는 자명하다.
우리는 공감력을 잃어가고 있다. 과도한 경쟁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없을수록 경쟁에 유리하다. 인정사정 안보고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완수해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공감력이 있을수록 자기 시간을 빼앗긴다. 협력 분위기를 만들고 남이 일할 수 있게 돕기는 할망정 자기 앞가림은 못 한다. 그런 사람을 보면 우리는 혀를 찬다.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말이다. “저 친구, 사람은 참 좋은데….”
공감력의 상실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나를 타인과 연결하고 세계로 확장하는 공감력이 없으면 나는 고립된다. 외톨이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경쟁 상대이자 비교 대상이 된다. 지고는 못 배긴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이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이다.
공감력을 잃지 않는 방법 중의 하나가 글쓰기다. 미워 죽겠는 사람에 관해 써보라. 희한하게도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마치 미워하는 사람의 집을 방문해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그는 내가 미워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 한 집안 가장으로서의 그를 보면 그의 형편을,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미워하는 사람에 관해 쓰고 읽어보면 글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내가 그처럼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그가 미운 것이다. 어떤 경우이건 미워하던 그를 보듬어 안게 된다. 이처럼 성찰하는 글쓰기는 공감력을 키운다.
공감력을 키우자고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럴 땐 글을 읽어도 된다. 시나 소설이 좋을 듯하다. 시, 소설과 가깝지 않은 분은 언론에 뜨는 인터뷰 기사 읽기를 권한다. 3분 정도 시간 내서 읽으면 한 사람의 수십 년 인생을 얼기설기 더듬어볼 수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조력자가 등장한다. 홀로 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타인을 헤아리는 것이 종국에는 내게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 때 타인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읽기 싫으면 사람과 만나 대화라도 해야 한다. 자주 만나는 모임이 있고 이들과 가끔 여행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다. 특히 듣는 노력이 중요하다. 다 듣고 난 후 “아프냐? 나도 아프다”고 말해보라. 분위기가 오그라들어 관계가 아예 끊기든지, 전에 없이 돈독해지든지 할 것이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공감해주는 이를 멀리할 사람은 없다.
사람 만나는 것도 싫으면 영화나 드라마라도 찾아보자. 일 년에 한두 번은 연극이나 뮤지컬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태양의 후예> 유시진 대위가 되기도 하고, <스카이 캐슬>의 김주영 ‘쓰앵님’에 빙의되기도 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아버님 그렇게 술 마시는 것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감당하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죽지 않으려면 절대적으로 술을 끊으셔야 합니다.”
강원국(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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