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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25 10:22 수정 : 2019.01.25 19:21

보통의 디저트

얼마 전에 “너무 무기력합니다. 어째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 나 역시 늘 심한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는 터라 딱히 해줄 말이 없어 “무기력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상대는 웃었다. 안도의 웃음일 수도 있고, 허탈한 웃음일 수도 있다. 왠지 그것만으로는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아 덧붙였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작은 성취를 이루는 것을 반복합니다”라고 답했다. 예를 들자면 베이글을 만드는 것처럼.

살며 가장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그래서 무기력했던 시기는 회사를 그만 두기 직전이었다. 온종일 일하면서 쉬지는 못하고, 하루걸러 밤늦도록 폭음을 하던 때라 언제나 수면 부족과 만성 피로에 시달렸다. 살아 있으나 내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나날이라 기력이 나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런 때에 나는 종종 빵을 만들었다. 이유는 모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해 집에 들어가 반죽을 만들고 모양을 잡아 오븐에 구웠다. 그렇게 만든 빵은 다음 날 회사로 가져가 부서원들과 나눠 먹었다. 그렇게 경계심을 흩트려 놓은 뒤 독이라도 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저 내 의지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내 삶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때였다.

그래서 베이글을 만들었었다. 베이글은 민숭민숭한 맛에 수더분한 모습과 달리 만드는 과정이 매우 까다로웠다. 우선 반죽 만들기부터가 복잡하다. 강력분과 박력분이 동시에 들어가는데, 계량을 잘못하면 어떤 때는 쿠키가 되고, 어떤 때는 호빵이 되었다. 정확히 계량한 뒤엔 이스트와 소금을 넣은 뒤 물을 부어가며 반죽을 해야 한다. 정말 신기한 것이, 같은 양의 물을 넣는데 할 때마다 반죽의 점도가 달라 언제나 찝찝했다. 그렇게 만든 반죽은 주먹 크기로 떼어낸 뒤 밀대로 밀어 도넛 모양으로 형태를 잡아줘야 한다. 당연히 뜻대로 안 된다. 자꾸만 손에 들러붙어 수습하다 보면 초등학생이 지점토로 만든 유에프오(UFO)처럼 변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한 시간쯤 발효시킨 뒤 끓는 물에 데친다. 놀랍게도 베이글은 물에 한 번 삶는 빵이다. 데친 것을 건져내 오븐에 구워주면 일단 완성. 하지만 모양도 맛도 내가 아는 베이글이 아니었다.

만든 베이글을 가지고 회사로 출근해 부서원들에게 주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비관적이었다. “이게 뭐라는 거냐?”, “아우 빵이 맛이 왜 이래.”, “떡이냐?” 등등. 기껏 만들어 간 빵을 나눠주고 그런 소리를 들으면 진짜 독이라도 타버리고 싶었지만, 끝끝내 그러진 못했다. 천성이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

돌이켜보면, 반응에 상관없이 빵을 만드는 것은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었다. 출근하고 나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뭣하나 내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회사 생활에서 유일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일이었다. 게다가 스콘이나 비스킷 같은 경우는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게 되어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느낄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무기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나 한 방에 이 괴로운 감정을 잊게 해 줄 해결책도 쉽게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당장의 무기력이 더 너무 크게 느껴져, 반전을 바라며 더 크고 강한 성취를 원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더 크고 강한 실패를 맛본 뒤 더 깊은 무기력에 빠져 자신을 스스로 ‘뭣도 못하는 인간’으로 여기는 지경이 되곤 한다.

그러니, 베이글을 만들어 보시길. 삐뚤빼뚤 꽃을 그려보고, 턱없이 짧은 목도리를 짜보시길. 놀이터 철봉에 매달리고, 색종이로 거북이를 접어보시길. 작은 성공의 연속에서 성장을 경험하시길. 그런 나날들이 쌓이고 쌓여 무기력을 등에 지고 살아갈 수 있는 어떤 확신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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