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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모먼트’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이들. 사진 강나연 객원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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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그림러&그림
'소확행' 시대에 뜨는 취미, 그림 그리기
그림 도구 갖춘 화실도 많아
도자기·접시 등에 그리는 그림은 특별해
쉽고 간편한 디지털 페인팅도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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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모먼트’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이들. 사진 강나연 객원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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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도구만 있을 줄 알았는데, 재즈가 흐르고 와인 향이 가득했다. 지난달 29일 저녁 8시. 서울 강남구에 있는 미술학원 ‘아트 모먼트’에는 그림 그리기에 푹 빠진 직장인 10명이 있었다. 남덕우(32)씨는 화이트와인과 피자 한 조각을 옆에 둔 채 아크릴화를 그리는 중이었다. “원래 재즈를 좋아하는 데다 약간의 소음이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카페에서 그리는 것 같아요.” 남씨는 공대를 졸업한 건설회사 엔지니어로, 그림을 배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옆에서는 그의 아내 권도희(27·홈쇼핑 엠디)씨가 강아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반려견 몰티즈예요. 남편이 그리는 건 신혼여행지에서 찍은 우리 사진이고요. 결혼한 지 3주 됐어요.(웃음)” 완성한 그림은 신혼집에 걸어둘 생각이다. “제 삶에서 찾아낸 소재를 그리면 설령 좀 못 그리더라도 애착이 생겨요.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제 강아지니까요.” 디자인 전공자인 권씨는 입시 미술을 해봐서인지 이 순간이 더 각별하다고 했다. “입시 때 기계적으로 그린 정물화는 아무리 잘 그려도 소장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누구나 어릴 때는 그림을 그린다. 말문이 터지기도 전에 직선과 곡선을 그리고, 집안에 ‘크레파스 벽화’를 그린다. 선사시대 동굴벽화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림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 수단이다. 좌뇌보다는 우뇌를 쓰던 시기,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시기로 회귀하기 때문일까. 선 긋기를 하고, 붓질을 하다 보면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든다. 골치 아픈 현실을 잊기에는 그만이다. 심리치료에서 미술이 보편화된 이유이자, 그림을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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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해소로 그림 그리기만한 것도 없어요!
6년째 방송국에서 일하는 정인태(34)씨는 식사와 수면 패턴이 망가지면서 정신까지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과 술도 마셔보고 여행도 다녀봤지만, 스트레스가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다. “1주일에 1~2번 미술학원 ‘아트 모먼트’에 와서 그림을 그리는 게 요즘 제 ‘소확행’이에요.” 취미 미술은 말 그대로 취미 미술이라 입시 미술의 딱딱함과는 거리가 멀다.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니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요.”
최규리(25·백화점 직원)씨에게도 그림은 여러모로 부담이 적은 취미다. “스쿠버다이빙을 비롯한 여러 운동을 해봤는데, 날씨 같은 제약이 많았어요.” 그림은 그런 제약이 없을뿐더러 장비를 살 필요도 없다. “요즘 화실은 그림 도구를 다 갖춰놔서 몸만 가면 돼요.” 그는 나이프와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울퉁불퉁한 촉감을 살린 비구상화를 그리는 중이다. “거실에 제 그림을 걸고 싶어요. 미술관 그림은 너무 비싸잖아요.”
비싼 값을 주고 그림을 구입하느니 차라리 그리기로 한 사람은 또 있다. 유지윤(43·사업)씨다. 지난달 28일, 미술학원 ‘아트 아뜰리에’에 갔을 때 가장 눈에 띈 것은 한쪽 벽면을 절반가량 차지하는 거대한 캔버스와 그 앞에 선 유씨였다. “갱년기 우울증을 그림으로 극복하신 엄마가 권유해 취미 미술을 시작했다”는 유씨는 스페인의 유명작가 에바 알머슨의 100호짜리 그림을 모작하고 있었다. 모작은 상업적 용도로 쓰지 않는 이상 불법이 아니다.
“에바 알머슨 특유의 따뜻한 감성, 사랑스러운 느낌이 있어요. 이 인물들의 표정을 좀 보세요. (휴대전화로 알머슨 그림을 보여주며) 꼭 꿈꾸는 것 같지 않나요? 이런 그림을 집에 걸면 저까지 행복해질 것 같아서 갤러리를 통해 알아봤더니, 가격이 2천만원이더라고요.” 2천만원이라니! 차라리 직접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한 번씩 와서 그리고 있어요. 차근차근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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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슬린페인팅을 가르치는 ’블루밍로렌 포슬린 스튜디오’. 사진 블루밍로렌 포슬린 스튜디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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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에 그리는 그림은 특별해요
캔버스나 종이에 그려야만 그림일 리 없다. ‘포슬린페인팅’은 흰 도자기에 그리는 그림인데, 이혜영(36·금융감독원 직원)씨는 여기에 매료된 경우다. 어느덧 8년째. 그새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포슬린페인팅은 이제 단순한 취미가 아닌 삶의 일부다. “은퇴 후에도 가마(도자기 굽는 용도)를 사서 포슬린페인팅을 하고 싶어요. 제2의 꿈을 찾았다고 할까요?” 그는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도 주말마다 집이 있는 은평구와 ‘블루밍로렌 포슬린 스튜디오’가 있는 논현동을 오간다. 웬만한 열정으로는 안 될 일이다.
이씨가 생각하는 포슬린페인팅의 매력은 실용성이다. “저는 실용주의자라 실생활에서 쓰는 걸 만드는 게 좋아요. 파스타 접시, 찻주전자 세트를 만들기도 하고, 선물용으로 시계나 찻잔, 액자, 보석함도 만들고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손재주요? 미술은 아예 젬병인걸요(웃음). 포슬린페인팅은 정말 손재주가 없어도 되는 게, 엉터리 같이 그려도 그 엉터리 같은 게 곧 개성이 되거든요. 그리고 난 후 최종적으로 구우면 그림 솜씨가 좀 떨어져도 작품은 멋있어 보여요.”
지난달 30일,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케이(K)래빗 포슬린아뜰리에’에서 대화한 손혜승(36?주부)씨도 5년 전부터 포슬린페인팅에 빠졌다. “굉장히 몰입도가 높은 작업이에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땐 다른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처음에는 주로 접시나 소스 볼, 스푼, 머그잔 등을 만들었는데, 요즘에는 ‘아이디어스’(수공예품 장터 앱)에서 팔 수 있는 펜던트도 만든다. “강아지에게 걸어줄 수도, 사람이 쓸 수 있는 펜던트예요. 강아지가 죽고 난 후 견주들은 그 펜던트를 보면서 그리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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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모먼트’에서는 와인을 마시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사진 강나연 객원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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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K)래빗 포슬린아뜰리에’에서 포슬린페인팅을 배운 손혜승씨 작품. 사진 케이(K)래빗 포슬린아뜰리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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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씨 보완해주는 디지털 페인팅, 빠르고 쉬워요
요즘 같은 세상에 ‘디지털 페인팅’을 빼놓고 그림을 말할 수 있을까? 이젤이나 물감은 놓을 공간이 따로 필요하다. 디지털 페인팅은 태블릿 한 대면 충분하다. 그리는 과정도 얼마나 수월한지 모른다. 색연필화를 그리려면 색연필을 계속 바꿔야 하고 펜화를 그리려면 힘을 계속 조절해야 하지만, 디지털 페인팅은 포토샵 툴 하나면 끝이다. 다소 부족한 손재주는 컴퓨터가 보완해주며, 색깔이나 선을 잘못 써도 빠른 수정이 가능하다.
지난달 30일 밤 10시, 서울 마포구에 있는 ‘뭉작가의 미술집’에서 수업을 마친 오정아(30?보험회사 계리팀)씨는 “‘워라밸’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디지털 페인팅을 배운다”고 했다. 그는 친구들 얼굴이나 캐릭터를 그려서 선물할 때 기쁨을 느낀다. 디지털 페인팅의 장점 중 하나는 상품화가 쉽다는 것이다. “조만간 화실에서 하는 전시회에도 참여하는데, 그때 티셔츠나 모자 같은 ‘굿즈’도 만들어보려고요.” 그렇게 말하는 오씨에게서 설렘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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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디지털 페인팅도 인기다. 디지털 페인팅 전문 수업 공간인 ’뭉작가의 미술집’에서 작업 중인 수강생. 사진 뭉작가의 미술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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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디지털 페인팅도 인기다. 사진 뭉작가의 미술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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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빠진 이들은 대체로 그리는 행위를 통해 뭔가를 되찾으려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건 삶의 여유나 자유일 수도, 어릴 적 꿈일 수도, 눈에 보이는 성취일 수도 있겠으나, 비단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미술평론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존 러스킨은 말했다. ‘6개월에서 1년 동안 매일 1시간씩 연습하면 원하는 건 뭐든 그려낼 수 있다’고. 그들은 그렸다. 잘 그리건 못 그리건 그렸다. 잘하려는 욕심 없이 그렸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이 말은 다시 쓰여야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쉽다.
강나연 객원기자 nalotos@gmail.com
그림 선이나 색채를 써서 사물의 형상이나 이미지를 평면에 나타내는 행위다. ‘그림러’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뜻인 신조어. 그림은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표현수단이다. 본래는 실용성보다 심미성이 강하지만, 요즘은 이모티콘이나 웹툰·캐릭터 같은 산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분야에서는 컴퓨터로 그리는 디지털 페인팅이 대세다. 재료에 따라 유화·수채화·아크릴화·색연필화 등으로 나뉘며, 소재를 기준으로는 인물화·풍경화·정물화·비구상화(추상화) 등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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