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07 09:37
수정 : 2018.12.0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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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프 라운지’ 2층 카페. 작가의 그림을 비슷하게 그려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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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그림러&그림
그림 감상만 하는 건 옛말
미술작가와 교류하는 공유 사무실
미술품 대여해주는 카페 등
전통주 마시며 드로잉쇼···'그림 파티'도
점점 진화하는 '그림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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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프 라운지’ 2층 카페. 작가의 그림을 비슷하게 그려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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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까지 먹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닐까. 최근 그림을 그리면서 음식을 먹을 수 있거나, 그림을 사고 파는 전시장에서 차나 술을 마실 수 있는 갤러리 겸 카페·레스토랑·바들이 늘었다고 한다. 오감이 만족하는, 이른바 ‘그림 카페’들이다. 그림과 음식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눈과 입이 즐거운 곳들을 모아 봤다.
추억 담긴 그림 보며, 달달한 간식
어린 시절,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으며 벽에 있는 낙서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경험을 가진 이라면 환영할 만한 곳이 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당고집’이 그렇다. 지난달 29일 일본식 경단을 전문으로 파는 카페인 이곳에 들어서자 살짝 구운 떡 냄새가 났다. 꼬챙이에 알알이 꽂힌 동그란 일본식 경단 위에는 분홍색·녹색·팥색·노란색의 앙금이 올라가 있어 먹기 전에 보는 재미도 있다. 딸기·녹차·팥·고구마로 만들어진 앙금이다. 달달한 간장 소스를 발라 콩가루에 굴린 ‘미타라시 당고’도 인기라고 한다. 각양각색의 앙금으로 장식된 일본식 경단처럼 이곳 벽면도 다채롭다. 흰 벽엔 손바닥 크기의 휴지와 4절 스케치북 종이에 색연필·물감·크레용·펜 등으로 그린 그림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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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집' 벽면. 손님들이 그린 그림이 빼곡히 붙여 있다. 김포그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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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을 운영하는 한유진(38)씨는 “2013년 2월 한 손님이 색연필로 그린 그림 한 장을 선물로 주고 간 게 시작이었다. 그 그림을 카운터 앞에 붙여 놓았더니 그 뒤로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그림을 그려서 벽에 붙이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모인 그림이 현재 500여개에 달한다. 그림을 붙이려고 아예 색연필 등 간단한 그림 도구를 챙겨 오는 손님이 꾸준히 있다고 한다.
4년 전 한 손님이 그려주고 간 그림 덕분에 이 집은 그림이 있는 디저트 전문점으로 탈바꿈했다. 새로운 메뉴도 생겼다. ‘이런 당고가 있으면 좋겠다’는 문구와 함께 일본식 경단을 병아리처럼 묘사해 그린 그림 덕분에 한씨는 노란색의 호박 앙금이 올려진 메뉴를 선보이게 됐다고 한다. 그림으로 시작 된 인연도 있다. 한씨는 “그림에 트위터·인스타그램 등의 주소를 적어 놓으면 나중에 그걸 보고 연락해 서로 친구가 된 손님들이 많다”며 “그림 한 장으로 기분 좋은 변화가 이곳에 일어났다”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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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프 라운지’ 2층 카페에서 판매하는 발효 빵 토스트.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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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음식 먹고, 그림도 빌려 보자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이너프 라운지’는 그림 전시장과 카페를 갖춘 2층 건물의 복합문화공간이다. 1층 그림 전시장에는 2천원을 내면 일주일 동안 미술작품 한 점을 빌려주는 매장이 있다. 그림은 그림 수집가 대부분이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저렴한 값으로 다수와 공유하고 싶어 내놓은 것들이다. 이 때문에 그림마다 작품을 구입하게 된 이유가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다. 단골 이솔(34)씨는 “이 작품을 구입 한 사람의 소감을 읽어보고 그림을 빌리는 일이 신선하게 느껴져서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말한다. 2층 카페에서는 이곳을 운영하는 김정은(39)씨가 3층 옥상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만든 샐러드를 맛볼 수 있다. 이밖에도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발효빵 토스트, 비정제원당(천연 설탕)으로 담근 유자·레몬청으로 만든 과일 차 등 건강한 주전부리들이 가득하다.
“이 그림은 작가 ‘이제’씨가 평소 길 고양이들을 챙겨주다가 느낀 감정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해요.” 카페에 상주하는 그림 전문 판매상 우흥제(40)씨를 따라 전시된 그림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이곳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작가와 함께 작가의 그림을 비슷하게 그려보는 체험 행사도 비정기적으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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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하우스' 2층 공유 사무실. 한 30대 손님이 미술품을 보며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포그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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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며 그림을 볼 수 있는 곳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미나리 하우스’. 다홍색 빛깔의 잘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가 있는 2층 건물의 주택이 최근 문화 공간 ‘미나리 하우스’로 변신했다. 3년 전에는 갤러리 겸 게스트하우스였다. 이경화(27) 매니저는 “작가와 대중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1층 갤러리 겸 카페, 2층은 작가와 일반인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유 사무실로 바꿨다”고 한다. 1층 갤러리에선 그림 전시를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바로 구매할 수 있다.
고상하게 그림을 감상해야 할 것 같은 이미지의 갤러리에서 맥주를 구입해 마실 수 있는 점도 재밌다. 1층 카운터에는 ‘광화문 맥주’, ‘제주 위트 에일’ 등 다양한 수제맥주들이 진열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매니저는 “사람들이 좀 더 마음 편하게 그림을 보러 올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술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2층 공유 사무실에서는 작가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3시간(9천원), 하루 이용권(1만2천원), 한 달 이용권(15만원) 등 이용권을 구매하면 된다.
“아무 술이나 마시며 그림을 볼 수는 없잖아요?” 문경 오미자, 영주 사과, 사천 참다래, 단양 매실 등 국내 생산된 과일로 만들어진 전통 과실주를 마시며 그림 전시를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담다’의 갤러리에는 미술 전문 큐레이터와 전통주 소믈리에가 전시가 있을 때마다 와서 자리한다고 한다. 조앤리(43) 대표는 “지난해 이곳에서 전시한 국내 작가의 작품을 국외 수집가들에게 소개할 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한국의 전통 과실주를 내놓았더니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술 마시며 즐겁게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올해 초부터 조 대표는 전통주 소믈리에가 추천하는 전통 과실주 30여종을 구비했다고 한다. 지난달에는 갤러리 담다 소속 작가들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선보이는 ‘라이브 드로잉 쇼’도 열렸다. 전문 디제이가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은 전통 과실주를 마시며 작가의 ‘그림 쇼’를 감상하는 일종의 ‘그림 파티’다. 술은 또 하나의 예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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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드 카페 앤 갤러리' 2층 전시장. 차를 마시며 그림을 바라볼 수 있다. 김포그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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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처럼 그림만을 감상하는 곳
‘호아드 카페 앤 갤러리’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뒷골목에 있는 갤러리 레스토랑이다. 1층은 카페 겸 레스토랑, 2층은 전시장으로 구성된 이곳에서는 지난달 30일부터 작가 김용주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우선 작품 앞에 긴 테이블을 놓은 게 눈에 띄었다. 마주보면 안 되고 무조건 나란히 앉아야 한다는 듯이 테이블 한편에만 의자가 배치돼 있었다. 앉는 순간 그림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영화관에 온 것처럼 차를 마시며 작품을 감상한다. 옆 사람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단란한 분위기에 지친 마음이 저절로 힐링 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일까? 마음을 녹여주는 생크림이 가득 있는 오스트리아 크림 커피 ‘아인슈페너’가 가장 인기 메뉴라고 한다. 레몬청을 섞은 ‘히비스커스 허브티’도 붉은 색의 새콤달콤한 맛으로 눈과 입을 사로 잡는다.
전시장의 창문 밖으로 삼청동 일대의 한옥 기와 지붕이 보인다. 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또 다른 재미다. 군데군데 설치 한 현대미술 설치작품과 창밖의 옛 풍경이 어우러져 이색적이다. 구경하는 데에만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전시에 집중해 출출해질 즈음 1층 레스토랑에 내려가면 감베로니 명란 로제파스타, 시금치 갈릭 피자 등 독특한 이탈리안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그림 선이나 색채를 써서 사물의 형상이나 이미지를 평면에 나타내는 행위다. ‘그림러’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뜻인 신조어. 그림은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표현수단이다. 본래는 실용성보다 심미성이 강하지만, 요즘은 이모티콘이나 웹툰·캐릭터 같은 산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분야에서는 컴퓨터로 그리는 디지털 페인팅이 대세다. 재료에 따라 유화·수채화·아크릴화·색연필화 등으로 나뉘며, 소재를 기준으로는 인물화·풍경화·정물화·비구상화(추상화) 등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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