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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19 20:02 수정 : 2017.04.19 21:09

[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옆집으로 이사 온 친한 회사 선배···함께 영화보고 술, 밥 먹고

2006년 개봉한 영화 <가족의 탄생> 포스터. <한겨레> 자료사진
“나중엔 철군 집 근처에 살 거야.” 선배는 언젠가부터 종종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린 딱 2년을 같이 일했을 뿐인데 그 이후로 10년 넘게 친구로 잘 지내고 있었다. 늘 아이디어로 번뜩이는 그녀와, 그 아이디어를 착착 진행시키는 나. 둘 다 카피라이터였지만 서로가 잘하는 것이 너무나 달랐고, 그래서 우리의 호흡은 착착 맞았다. 하지만 일을 같이하는 것과, 이웃이 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니, 선배가 나에게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친한 누군가와 이웃이 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좋게 말하면 혼자 있어도 외롭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사회성이 지극히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나중에 꼭 철군(선배는 꼭 나를 이렇게 부른다) 집 근처에 살 거야.”

“좋아요.”

나는 늘 긍정의 답을 보였다. 어쩌면 너무 먼 미래처럼 보였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둘 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야 가능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 다 백발이 되어 동네 어귀에 앉아 음악을 틀어놓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그 장면은 그럴싸했다. 캬! 직장 선후배로 만나 노년에 이르기까지 친구로 지내는 모습이라니. 상상만 해도 멋있었다. 외국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장면을 차례로 상상했다. 아무래도, 멋있었다.

하지만 선배는 선배였다. 후배가 막연히 상상만 하며 키득거리는 동안, 선배는 정말로 우리 동네에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아파트에 빈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살기엔 좀 크다 싶은 우리 아파트에 친구와 함께 이사를 왔다. 이사 오기 전부터 그녀는 계속 말했다.

“질척거리지 않는 이웃이 될 거야.” 같이 이사 온 언니도 함께 말했다.

“우리 둘이서 맨날 다짐하잖아. 철군에게 질척거리지 않는 이웃이 되자고.”

하지만 그건 언니들의 기우였다. 언니들이 이사 오자마자 곧장 질척거리는 이웃이 되고 만 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퇴근길에도 옆집에 들러 밥을 얻어먹고 돌아왔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도 옆집에 들러 술을 얻어 마시고 돌아왔다. 처음 생긴 이웃에 내가 너무 흥분해서 질척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깊어질 무렵, 옆집 언니들도 우리 집에 놀러 와 밤늦도록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돌아갔다. 동네 맛집들을 공유하고, 동네 철물점과 병원들을 공유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서로의 집을 오가는 날들이 많아졌다.

“꼭 집 근처에서 살거야”
실제 이웃이 된 회사 선배
엘리베이터 택배로 정 나누니
무청김치·김치볶음으로 돌아와

어느 날, 우리는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가장 친한 선후배의 관계이지만, 바로 옆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각자의 사생활은 있는 터. 아파트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물건을 우리는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바로 엘리베이터. 나눠줄 물건이 있으면 선배는 전화를 했다.

“지금 집이지? 올려보낼게. 받아.”

아.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고 케이크 한 조각만 바닥에 놓여 있는 풍경을. 나도 후다닥 집을 둘러본 후에 나눠주고 싶은 물건들을 챙겼다. 작은 통에 새우젓을 담았고, 옥수수차도 조금 덜었다. 그리고 질세라 전화했다.

“저도 지금 뭐 내려보내요. 받으세요.”

엘리베이터를 먹거리 전달통로로 활용해 이웃과 나눠 먹는 케이크. 사진 김민철 제공
밤에도 낮에도 엘리베이터 택배는 성실히 배송 업무를 수행했다. 심지어 무료배송이었다. 쌈 야채가 올라갔고, 청귤청이 내려갔다. 고수를 내려보냈더니, 몇 시간 후에는 그 고수가 들어간 콩 샐러드가 우리 집 엘리베이터로 올라왔다. 푹 익은 무청김치를 나눠줬더니, 며칠 후 맛있는 김치볶음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갑자기 올리브오일이 떨어졌을 때에도, 시골에서 시어머님이 맛있는 걸 많이 보내주셨을 때에도 엘리베이터는 언제나 움직였다.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어느새 가족이 되어버렸다는 걸. 좀 느슨한 가족. 그래서 산뜻한 가족. 어떤 의무감도 없고, 어떤 책임감도 없지만 유대감만은 가득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

생각해보면 대구에 있는 엄마와도 일 년에 많이 만나 봤자 2~3번이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 게 가족이라지만, 아무리 지금 이 콩이 맛있어도 대구에 있는 엄마에게 전해줄 방법은 요원하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언니들에게는 바로 전달해줄 수 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난 곤란함에 대해서도 멀리 사는 동생보다는 옆집 언니들에게 털어놓게 된다. 자잘한 일상에 지친 날 저녁에도 위로가 되는 건 옆집 가족들과의 술 한잔이 될 때가 많았다. 그렇다면 이걸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라 불러야 할까? 전통적이지 않더라도. 상식과는 조금 어긋나더라도.

최근, 옆집 언니들 덕분에 다시 한번 ‘가족’이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연찮게 다들 비슷한 시기에 휴대폰이 망가져서, 남편과 나, 그리고 언니들도 동네 휴대폰 가게에 갔다. 다들 똑같은 휴대폰을 골랐는데, 부담해야 하는 휴대폰 비용은 달랐다. 이유는 바로 그 ‘가족증명서’.

남편과 나는 가족증명서가 있어서 가족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언니들은 받을 수 없었다. 아무리 같은 집에 살면서 같은 통신사의 인터넷과 텔레비전과 휴대폰을 써도 가족증명서가 없으면 할인이 안 된다니. 그제야 우리나라 제도들이 다 ‘생물학적 가족’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1인 가족의 비율이 40%를 육박하고, 아무리 전통적 가족 형태가 해체되고 있어도 여전히 제도적으로는 ‘아빠-엄마-아들-딸’만이 가족의 기본 형태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더 많은 고객들을 자기 통신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가족할인’이니 ‘결합할인’이니 상품을 만들어놓고, 가족을 그렇게 좁게 설정해 놓으면 무슨 소용이야”라며 불평불만을 토로하던 내게 갑자기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대박. 이런 상품 하나만 출시하면, 그 통신사 완전 대박 날걸? 거기에 젊고 발 빠른 이미지도 같이 얻을 수 있어! 우와. 대박.”

도대체 무슨 아이디어냐고? 새로운 가족 형태에 맞춘 새로운 상품! 바로, ‘신개념 가족 결합 상품 ? 친구도! 연인도! 하숙생도! 자취인도! 함께 산다면 우리 모두 가족! 가족이면 모두 다 할인!’

시대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이런 상품만 나와준다면 남자친구와 결혼 대신 동거를 결심한 내 친구도, 결혼은 하기 싫지만 외롭게 살긴 또 싫어서 친구와 함께 살기로 결심한 또 다른 친구도, 비싼 집세 때문에 한 집을 여러 명이 나눠 쓰는 또 다른 친구도, 그리고 물론 우리 옆집 언니들도 모두 그 통신사로 옮길 텐데.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휴대폰까지 싹 다 옮길 텐데. 누가 먼저 시작할지는 몰라도 그 회사 매출 좀 오르겠는데? 이 아이디어, 돈 받고 팔아야 하나?

김민철 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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