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21 10:12
수정 : 2007.06.2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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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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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부모 약혼 성화는 ‘먹튀’ 할까봐 안달에 그런거고…
이넘저넘 열댓번 지지고 볶아 보고 하던지말던지
Q올해 26살의 직장인입니다. 23살 때부터 3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처음 사귈 때 학생이었고 사는 지역이 달라 한 달에 몇 번 못 보지만 서로 집안도 오갔지요. 전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중퇴하고 일하고 있었고요. 그렇게 사귀다가 결혼 얘기를 꺼냈는데, 졸업하고 자리 잡히고 돈 좀 모으면 결혼하겠다고 하더군요. 그 전에 결혼하더라도 남자 집에서는 도와줄 능력도 있었고 어머니도 반대하시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렇다고 저에게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말만 하면 알면서 또 그러냐고 화만 내고. 저희 집안에서는 약혼이라도 하라고 성화시고. 그러다 올해 4월 남자친구는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나갔습니다. 그즈음 저에게 대시를 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마음이 점점 기울어지더군요. 물론 전 그에게 남자친구 얘기도 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났고, 혼자 힘들어하다가 절 못 잊겠다며 찾아온 그 남자에게 전 결국 넘어갔어요.
지금은 서로 장래를 약속하며 결혼 자금을 모으고 있죠. 전 남자친구에게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은 힘들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3년이란 추억을 무시할 수 없더군요. 자꾸 생각나기도 하고. 그렇다고 지금 남자친구가 싫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어떤 것이 진짜 사랑인지, 진짜 제 인연인지 잘 모르겠어요. 8월에 한국에 한 번 들어온다고 하는데, 그때까진 마음을 결정해야 하는데, 제 마음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떡하죠?
A 오, 이거 완전 자잘한 질문의 아수라장이네. 할 수 없다. 어수선하게 가자.
1.우선, 오버랩 양다리 시추에이션. 들키지 마. 약조 없는 별리는 그의 선택. 원천 귀책사유 그에게 있다고. 당신은 ‘후’남친 대시에 ‘선’남친의 존재, 고지했다며. 게다가 ‘선’에게 통보 결의도 했고. 그 정도면 양호한 염치야. 들키면 당신이 아니라 상황이, 사건을 진행한다고.
1-1.‘선’의 “자리 잡고 돈 좀 모으면.” 이 꼭 핑계만은 아냐. 수컷의 결혼 공포는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 말미암은 사회경제적 부하에서 주로 기인한다고. 선사부터 그래 왔어. 과연 현재 근력과 경험치로 여타 수컷들과의 먹이경쟁 속에서 매번 사냥에 성공해 식탁에 식량 조달 해낼 수 있겠느냐. 그래 미루는 거라. 하지만 그런 연유로 순연된 결혼이 성사되는 법, 드물지. 언제나, 좀 더, 숙련된 사냥꾼, 존재하거든. 어리석어 불쌍한 수컷들이여.
1-2. 부모님 약혼 성화는, 그 놈이 먹고 튈까 봐. 근데 그리 묶어둬 뭐 하게. 제 발로 기꺼이 걸어 들어오지 않는 모든 관계는 당신이 빚지는 거야. 관계 균형, 무너져. 관계의 채무 탕감이 금전 변제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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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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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은 지금 연애가 아니라 결혼이 하고 싶은 거라. 근데 왜 당신이 그 나이에 벌써 연애하는 족족 결혼에 안달인지 알고 있나. 그거 결혼을 불확실한 당신 삶에 대한 보장자산으로 간주해 그런 거거든. 타박하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이유는 알고나 안달하라고.
2-1.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이야. 당신만 불안한 게 아냐. 그걸 스스로 감당하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어른이 돼. 그게 무서워 질질 짜는 것까진 괜찮아. 다들 그러니까. 하지만 그걸 남이 대신 해결해 주길 바라진 말라고. 남자가 능력 없는데 그 집이 능력 된다는 게 어떻게 당장 결혼의 조건이 되나. 그 집과 결혼하나. 그건 성장지체를 넘어 노예근성이야.
3. 당신이 왜 선택을 못 하는지 아나. 진짜 사랑을 몰라서가 아냐. 잘못 선택하면 손해날까 두려운데, 대체 잘, 선택하는 게 뭔지 자기도 몰라 황망해 그러는 거야. 선택은 상대가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달린 거라고. 당신은 당신이 무엇으로 행복해지는지 알고 있나.
3-1.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거, 일종의 신화야. 사랑으로 결혼해도 불행해지는 커플 부지기수고, 조건 맞춰 결혼해도 잘 사는 이들 적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떤 것인가에 있는 거야. 돈과 외양이 훨씬 중요한 사람도 있고 생의 불확실성과 흥분을 함께 누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고. 결혼에서 가장 먼저 할 질문은 ‘누구랑’이 아냐. ‘나는 언제 행복한가’라고. 사랑이냐 조건이냐, 따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지가 어떤 놈년인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것만 따지고 자빠진 거, 그게 멍청한 거라고.
4. 내 결론은 그래. 결혼, 아직, 마. 행복은 가르칠 수 없는 거야. 겪는 수밖에 없다고. 배신, 당해도 보고 배신, 하기도 하면서 이놈과 지져도 보고 저놈과 볶아도 보는 걸 적어도 열댓 번은 진심 다해, 해본 후, 해도, 해.
4-1. 그래도 꼭, 지금, 해야겠다면, 이거 하나는 명심하라고. 결혼은 숙명이 아니라 제도야. 사람들이 발명, 한 거라고.
* 덧붙임 결혼 제도의 절대 위상은 21세기와 함께, 저문다, 는 게 내 생각이야. 굿럭, 베이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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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는? 배우이자 뮤지컬 제작자 박해미씨와 딴지일보 총수이자 방송인 김어준씨가 독자들의 ‘관계 개선’ 상담가로 나섰습니다. 부부관계, 가족관계, 직장 내 관계, 애인 관계, 친구 관계 등 살면서 엮이게 되는 인간관계의 고민에 대해 매주 번갈아 시원하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상담을 원하는 독자는 고민 상담메일(gomin@hani.co.kr)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100% 비밀보장, 100% 고민해결을 책임집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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