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06 22:09
수정 : 2007.06.08 15:20
[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태극기가 자랑스러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저 그렇습니다. 디자인이 너무 난해한 듯도 합니다. 겨레의 혼이 담겼다는데, 혼이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태극기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자랑스럽다고 달달 외웠는데 말입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오랫동안 쇼를 했습니다. ‘충성다짐 쇼’ 말입니다. 그 쇼가 어처구니없다는 비판이 설득력 있게 퍼지자, 정부가 최근 쇼프로 개편에 들어갔습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 이야기입니다. 행정자치부가 내놓은 ‘쇼 개편 문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국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사랑과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오우 대단히 진보적이군요, 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못합니다. 대신 이런 논평을 선물합니다. “쇼하고 계시는군요.”
이 가벼운 지면에서 ‘국가주의’ 어쩌구 폼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국가가 쇼를 강요하는 세상은 지났다는 겁니다. 커버스토리에서 보시다시피, 개인들의 쇼가 만개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개인과 국가의 커뮤니케이션이 그렇게 재미없고 고지식해서 되겠습니까.
혹시나 이런 쇼 문안은 어떻습니까. 제 맘대로 지어본 겁니다. “나는 우리나라 국기를 앞에서 개인과 가족, 공동체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힘쓸 것은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살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누군가 정해준 대로 모두 함께 외치는 건 ‘재미없는 쇼’같습니다.
고경태/<한겨레> 매거진팀장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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