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06 21:51
수정 : 2007.06.12 14:53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주객 구분이 사라진 리얼리티쇼의 세계적 유행, 오직 좀 더 리얼하게!
5월부터 매주 화요일 방영되는 한국방송의 퀴즈쇼 <1:100>은 여느 퀴즈 프로그램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떤 문제가 나올까, 주인공이 그 문제를 맞출 수 있을까는 여기서 잔재미에 불과하다. 진짜 재미는 1명의 도전자와 100명의 패널이 벌이는 신경전이다. 문제가 까다로워지면 ‘1’은 ‘100’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이 도움이 진짜 도움인지 도움을 가장한 함정인지 판단해야 한다. 5일 출연한 정영진(33)씨는 마지막 단계에서 ‘나와 같은 답변’이라는 찬스를 썼지만 자신과 같은 답을 찍은 패널의 이야기를 듣고는 답을 수정했다. 문제를 푸는 내내 진행자 김용만에게도 “왜 자꾸 저를 떠보세요”라는 구박을 들을 만큼 용의주도하게 신경전을 펼친 그는 이 프로그램의 첫번째 ‘퀴즈왕’이 돼 5000만원의 상금을 거머쥐었다.
심사위원보다 객석을 휘어잡아라
<1:100>의 주인공은 ‘1’의 도전자가 아니다. 1과 경쟁하는 ‘100’의 패널들에는 ‘주’와 ‘객’의 구분이 없다. 3회 때는 패널 중 한 사람이 도전자를 꺾고 우승을 하기도 했다. 퀴즈왕이 된 정영진씨는 1회부터 4회까지 패널로 출연했다가 예심을 거쳐 도전자로 나왔다. 연예인과 일반인의 경계도 없다. 연예인이 도전자가 되기도 하고 또 100명의 패널 중 한 명이 되기도 한다. 연예인이건 일반인이건 각자의 쇼맨십을 발휘해 도전자를 부추기고 헷갈리게 하며 실력을 발휘하는 게 각자의 목표다. <1:100>은 연예인과 일반인, 무대 위와 무대 아래의 경계를 허물고 그 모든 걸 한자리에 모았다는 점에서 ‘퀴즈쇼’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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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퀴즈쇼 <1: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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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쇼의 세계적 유행은 쇼를 ‘하는’ 사람과 쇼를 ‘보는’ 사람의 경계를 허물었다. 쇼를 보던 사람이 쇼를 하는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고 그냥 시청자라 하더라도 쇼 제작자가 차려놓는 밥상을 얌전히 받던 옛날의 시청자가 아니다. 시청자들은 이미 텔레비전 안에 들어가서 출연자 옆으로 바짝 다가간다. 문화방송의 <무한도전>에서 출연자들이 엉뚱한 행동을 하면 곧바로 ‘또 항의 들어올라’‘인터넷 난리났던데’ 식의 자막이 들어간다. 제작자들이 만든 것이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표현되는 것과 다름없다. 또 쇼를 보는 이와 하는 이의 거리가 좁혀지니 쇼를 즐기는 방식도 달라진다. 관전포인트는 유재석과 일당이 미션을 수행하느냐가 아니라 이들이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과 실수를 하느냐다. <1:100>처럼 가장 완고한 형식의 퀴즈 프로그램에서도 ‘지식을 얻는’ 재미보다 출연자들의 ‘리얼’한 상황이 더 큰 재미를 주게 됐다
5월25일 첫 전파를 탄 문화방송의 <쇼바이벌>은 미국에서 기록적인 시청률을 낸 리얼리티 서바이벌쇼 <아메리칸 아이돌>을 떠올리게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이름이 알려질 기회를 얻지 못한 무명이나 신인가수 20팀이 출연해 경합을 벌인다. 실력과 무관한 게임으로 탈락자를 내는 중간 과정을 거치고 남은 일곱 팀이 지방 무대에서 공연을 벌이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 실력을 뽐낼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했던 가수들은 저마다 눈에 뜨이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여기서 가수들이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은 심사위원이 아니다. 연령별로 구성된 객석의 투표를 통해 한 회의 우승자가 가려진다. 제 아무리 뛰어난 실력이 있어도 객석을 휘어잡지 못하면 탈락이다. 심사위원의 ‘착한 제자’가 돼야 했던 이전의 오디션 프로그램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장난같은 게임에도 운명을 걸듯…
시청자나 객석에서 직접 스타를 뽑는다는 게 <아메리칸 아이돌>과 이 프로그램의 공통점이라면 다른 점은 출연자의 성분이다. 또 이것은 미국적 리얼리티쇼와 한국적 리얼리티쇼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든다. <아메리칸 아이돌>의 출연자들이 옆집 동생처럼 평범한 미국인이라면 <쇼바이벌>의 출연자들은 고생을 많이 한 무명가수들이다. 전자가 평범한 사람의 신데렐라 되기, ‘미운오리새끼’ 신화를 창조한다면 후자는 무명가수의 설움과 무대에 한번 서 보는 게 꿈인 이들의 절실함에 초점을 맞춘다. 대중문화 평론가 강명석씨는 “인터넷의 발달로 한국에서는 <아메리칸 아이돌>의 신비감이나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없는 대신 장난같은 게임에도 운명을 걸고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들의 절박함이 한국 시청자들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다”고 이 프로그램의 차별화 전략을 평가했다.
한국에서 쇼를 하는 이와 쇼를 보는 이, 연예인과 일반인의 거리를 좁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사연’이다. 지난해 <서바이벌 스타오디션>을 만들기도 했던 <1:100>의 전진학 피디는 “일반인 출연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건 멋진 외모가 아니라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시청자들은 단순히 즐긴다기보다 이들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며 이 프로그램 역시 앞으로 출연자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주목하는 감정적인 호소에 연출 방향을 맞춰갈 것”이라고 말했다. 출연자가 돈이 든 가방을 찍어서 맞출 경우 챙기는 케이블 채널 ‘티브이엔’의 <예스 오어 노우>가 ‘사행성’이라는 비판을 피해 시청자들을 끌어모으는 것도 돈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은 출연자들의 ‘기구한’ 사연이다.
9일부터 케이블채널 ‘스토리온’은 시청자들의 갖가지 황당한 사연을 무대로 끌어올려 갈등 당사자들을 직접 대결하게 하는 리얼리티쇼 <스토리쇼 이사람을 고발합니다!>를 방영한다. 쇼의 무대는 점점 더 낮은 곳으로 내려오고, 사연은 휘황한 조명보다 더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누구나 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에 텔레비전 쇼는 그 재미와 의미를 바삐 바꿔가는 중이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그 퀴즈쇼, 표절이 아니라고?
<1:100> 등 외국 쇼프로그램 포맷 판권 수입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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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오어 노>, 사진 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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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을 본 시청자들의 상당수는 “이거 주한미군방송(AFKN)에서 하는 거랑 똑 같잖아. 표절 아냐?”라고 반응한다. 표절 아니다. <1:100>은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24시간 생중계하는 <빅 브라더 쇼>로 세계적인 화제와 논란을 낳았던 네덜란드 제작사 ‘엔데몰’의 작품으로 이 프로그램의 포맷 판권을 수입해 한국에서 제작한 것이다. 포맷 판권 수입이란 프로그램의 틀을 사서 현지 사정에 맞게 새로 제작하는 프로그램 제작방식이다. <1:100>은 유럽·미국·남미 등 17개국에서 제작돼 인기를 모은 퀴즈쇼다.
에스비에스의 <작렬! 정신통일>, <퀴즈! 육감대결> 등도 일본 후지티브이와 포맷 판권 계약을 맺고 국내에서 만든 프로그램이다. 케이블 채널로 가면 포맷을 수입한 프로그램들은 더 많아진다. 방송 네트워크에서도 지적소유권의 개념이 강해지고 또 온라인을 통한 일반 시청자들의 감시의 눈도 늘어나면서 이전처럼 무작정 베끼기 양태가 줄어드는 대신 정식으로 판권 수입을 하는 프로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표절이라는 오해나 안이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방송사가 판권 수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검증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1:100>의 전진학 피디는 “한국의 방송사들은 지금 프로그램 개발의 답보 상태에 있는데, 이럴 때 세계적으로 신선한 프로그램을 사 와서 자기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 만큼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1:100>이나 <퀴즈! 육감대결> 티브이엔에서 하는 <예스 오어 노> 등 포맷 수입물들은 일반인의 쇼 출연이 늘어나고 또 이전의 지식이나 힘, 재주의 대결에서 심리 대결로 바뀌어가는 세계적인 쇼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아직은 이렇다할 시청률을 내고 있지 못하는 이 프로그램들의 성공 여부는 현지화에 달려 있다. ‘엔데몰’에서 <예스 오어 노>의 포맷을 수입한 티브이엔 방송기획팀 김재겸 대리는 “외국에서는 일반인 출연자들도, 딱 한 사람뿐 아니라 건방진 사람, 시청자들이 상금 획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까지 다양하게 캐릭터화에 등장시키는데 우리는 아직 어렵고 힘든 사연이 많은 출연자에 대한 몰입도가 훨씬 강하다”며 “리얼리티쇼가 발전할수록 일반인들도 다양한 성격과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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