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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06 18:53 수정 : 2007.06.08 16:22

<슬램덩크>의 강백호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소년은 무엇으로 사는가. ‘꿈’으로 산다. 이 몸,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는 애벌레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눈부신 나비가 되어 저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리라는 꿈!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그랬던 것처럼.

열일곱 살 소년 강백호가 농구부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여자 때문이다. 첫눈에 반한 소녀와 가까이 지낼 수 있다면 농구부든 배구부든 야구부든 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순하고 해맑고 철없는 꼴통. 처음에 백호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러나 그는 빠른 속도로 변해간다. 타고난 체력, 뜨거운 열정과 투지, 악착같은 승부근성으로 농구 코트를 휘어잡기 시작한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주야장천 본인 입으로만 주장하던) 숨겨진 천재성이 마침내 발현되는 것이다.

물론 다디단 열매가 거저 얻어지지는 않는다. 스스로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소년은 죽을힘을 다해 특별훈련에 임한다. 언제나 말이 앞서던 소년이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알게 되는 거다. 녀석은 어느새 그럴듯한 진짜 농구선수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마침내 농구를 정말로 사랑하게 된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그의 고백은 코끝이 찡해질 만큼 순수하고 아름답다.

강백호는,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소년들이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의 롤 모델이다. 머리 나쁘고 공부 못하고 껄렁껄렁하던 아이가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찾아내는 순간, 잠재되어 있던 괴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서사란 말인가. 만화 속 소년을 바라보며 현실 속 소년들은 주먹을 꼭 쥔다. ‘그래. 나는 아직 내 재능과 열정을 온전히 쏟아부을 곳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야. 기다려라. 언젠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정규 교육 체제 안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당하는 잣대는 학과공부뿐이다. 공부를 못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구만리처럼 남은 인생 전체를 무시당해 온 아이들, 그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강백호의 사례는 하나의 환상적인 표상이다. ‘아무 것도 아닌 소년들’은 은밀하고 간절하게 의심한다. 어쩌면 나는 천재 농구선수일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천재 기타리스트일지도 몰라. 아아 어쩌면 나는 천재 영화감독일지도 몰라. 초라한 일상을 견디기 위하여 소년들은 제 팔뚝에 마취주사를 놓는다.

그러나 삶은 만화가 아니다. 소년들은 곧 강백호의 재능이 상위 1%였음을 알게 될 운명이다. 99%의 소년들은, 어떤 분야에서도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 나지 못했다. 소년들 앞에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만이 예정되어 있다. 그들은 농구선수나 기타리스트나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천재 농구선수나 천재 기타리스트, 천재 영화감독의 모습으로 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호처럼 노력하고 질투하고 부상투혼을 발휘한대도, 그들은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닌 청년들’로 남겨질지 모른다. 나에게 남과 다른 어떤 비범한 능력도 없음을, 나는 강백호가 아님을 쓸쓸히 인정하는 순간, 소년은 현실세계의 남자가 된다. 단념할 도리밖에 어쩔 수 없는.

정이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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