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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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혜리,영화를 멈추다
<해피엔드> 1999 정지우 감독, 전도연·최민식 주연 최보라(전도연)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검은 밤하늘에 분골 같은 재가 날린다. 그녀에겐 남편(최민식)이 있고 애인(주진모)도 있다. 결혼 전 연인 일범과 다시 시작한 사랑도 이제 심지 끝까지 타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복잡한 일이 있었는데, 다 정리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에는 다시 “같이 죽을까, 우리?” 하고 애인에게 물었다. 보라의 얼굴은 파국에 대한 저항도, 행복을 향한 열망도 다 흘러나가 고적하다. 그 때 아파트 아래쪽으로부터 노란 빛덩어리가 서서히 떠오른다. 망자(亡者)의 집에서 끈이 떨어진 근조등(謹弔燈)이다. 보라의 눈썹 위로 둥실 떠오른 ‘죽음’은 은은히 발열한다. 보라는 놀라는 기색 없이 피안으로부터 온 ‘전령’에게 손을 뻗는다. 그 동작은 눈에 띄는 물건을 무작정 입에 넣는 젖먹이의 그것처럼 무구하다. 근조등 불빛은 어느새 아파트 실내로 들어와 결혼사진 위에 일렁거린다. 배우 전도연에게 이 장면의 감정을 회고해 달라고 청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밤새워 촬영하던 시기라 마음이 텅 비어 있었다. 나도, 그리고 보라도 모든 게 꿈처럼 빨리 끝나주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근조등 신은 긴밀한 서사적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빼도 무방하다. 이야기 골격에 못질이 돼 있지 않아 영화 위에서 하느작거린다. 그래서 그림을 완성했는데도 남아있는 퍼즐 조각처럼 우리를 흔들어놓는다. 위치도 미묘하다. 아내의 부정을 참지 못한 서민기는 보라를 냉혹하게 살해하고 일범에게 혐의를 씌운다. 수사가 종결되자 민기는 보라의 유품을 없애며 통곡하는데, 근조등 장면은 거기에 이어 디졸브(서서히 어두워지며 앞 장면이 사라지고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편집 방식)로 편집됐다. 그리고 관객은 거실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민기를 본다. 그러므로 근조등을 응시하는 보라의 모습은 민기의 꿈이었다고 하면 간단히 설명된다. 그러나 이 장면의 촬영은 꿈꾸는 자의 시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명징하고 앵글이 객관적이다. 보라를 지켜보는 눈은 감독의 것이다. 이 장면은 감독이 민기를 포함한 관객에게 반드시 보여주고 싶은 보라의 이미지다. 알려진 대로 시나리오 단계에서 서민기는 아내를 백일몽 속에서만 해칠 수 있는 유순한 남자였다. 살인을 판타지로 처리할 경우, 근조등 장면은 현실에서 환상으로 진입하거나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문턱 구실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지우 감독은 지금의 위치가 더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논리적이지 않아서 좋다. 이 장면을 말로 설명하는 방법은 몇 가지 있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번번이 어색해진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란 대부분 말의 앞뒤를 맞추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느낌은 언제나 설명할 길 없는 곳에서 나온다.” 개봉 당시 근조등 장면은, 부정한 여성이 징벌받는 줄거리에 대한 사과의 제스처 아니냐는 의혹(?)도 받았다. 하지만 감독은 고개를 젓는다. 정말 변명이 필요했다면 훨씬 명료하게 했을 거라고.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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