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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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혜리,영화를 멈추다
교통사고로 불륜이 발각된다. 예기치 못한 배우자의 부정 앞에 몸서리치는 서영(손예진)과 인수(배용준)는, 태생적으로 건강하고 온건한 인간들이다. 몸도 마음도 금간 데 없이 살아 온 여자와 남자다. 그러나 건강하다는 말은 언제나 약간의 둔감함을 포함한다. 인수와 서영은 사랑을 과소평가하는 부류로 보인다. 남편과 아내와 나눠 온 다정한 평온함이 사랑이려니 선뜻 믿었고, 사랑이 변질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단들 그 독이 치사량에야 이르겠냐고 생각했을 남녀다. 강원도 삼척에서 배우자들의 병상을 겨우내 지키던 둘은, 기이한 연애를 시작한다. 남편과 아내가 놀러 다녔을 장소를 뒤밟으며 묵묵히 데이트를 하고 그들이 묵었을 호텔에서 정사를 나눈다. <외출>은 이를테면 역지사지 멜로드라마다. 허진호 감독은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흔한 말을 심사숙고한다.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요약되는 <외출>의 아이러니를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상황은 인수의 모텔 방에서 벌어진다. 왜냐고 굳이 묻지 않은 첫 번째 정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고요한 한때를 보내는 중이다. 서영은 사과를 깎는다. 다가 온 인수는 서영의 머리칼을 귓바퀴 뒤로 넘겨주고 그녀가 앉은 의자를 자신을 향해 돌린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서영의 두 손을 감싼다. 진심으로 소중히 여겨진 여인의 얼굴이 여왕처럼 빛나고 싸구려 회전의자는 고귀한 옥좌가 된다. 그때 문기척이 들린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인수의 장인이다. 서영은 외마디소리도 내지 못하지만 핏기가 가신다. 인수가 내미는 외투와 가방을 그러안고 화장실에 숨은 그녀에게 인수는 구두까지 챙겨 마저 들이민다. 몇 초 전만 해도 위대한 연인이었던 여자는, 순식간에 돌팔매를 겁내며 숨죽인 죄 많고 초라한 여자로 급전직하한다. 장인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던 인수가 살짝 돌아와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서영은 소금기둥이 된 양 서 있다. 문이 좀더 활짝 열리면, 관객이 방금 본 얼어붙은 서영의 모습은 욕실 거울에 비친 반영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제 화면에는 두 여자가 보인다. 인수를 기다리는 영원 같은 몇 분 동안 서영은 거울 속에서 겁에 질린 한 여자를, 남편의 정부-인수의 아내를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거울 너머 나라로 건너간 것이다.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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