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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5 17:13 수정 : 2007.05.31 14:45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 <짝패>

이 칼럼의 제목이 무색하게 <짝패>는 웬만해선 멈추지 않는 영화다. 인물이 움직이지 않으면 필경 카메라가 운동한다. 네 번째 장편 연출작 <짝패>를 마치고 류승완 감독은 “이제 관심사가 달라졌다. 앞으로 이런 순수 액션 영화는 못 만들 것 같다”고도 했다. 마지막이라 더 진득한 포옹. <짝패>는 화끈하지만 쓸쓸한 영화다. <짝패>는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혈기와 영감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인 동시에, 그런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이치를 확인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류승완 감독은 이제 홍안의 영화청년이 아니고, 설혹 사람이 머물고자 한들 강물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짝패>의 시선은 회억에 젖어 있다. 충청도 소도시 온성에서 주먹질을 하며 10대를 같이 보낸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이 들어 재회한다. 건달 일에서 손을 씻고 가게를 차려 정착한 왕재(안길강)가 살해당한 것이다. 범인은 10대 취객이었다지만, 태수(정두홍)와 석환(류승완)은 끈질기게 진상을 캔다.

소위 ‘본정통 액션’으로 불리는 대목은 본격으로 합을 맞춰 디자인된 <짝패>의 첫번째 액션 시퀀스다. 장면의 구도는 ‘사면초가’로 요약된다. 본정통 상점가를 휘적휘적 걸어가는 태수의 앞길에 춤연습을 하는 비보이들이 거치적거리는가 싶더니, 자전거를 앞세운 패거리가 밀고든다. 태수는 피식 웃고 피하려 하지만, 하키스틱을 걸머진 10대들과 <킬 빌>의 ‘고고 유바리’를 언니로 모실 법한 살벌한 소녀들, 그리고 방망이를 흉기삼은 야구부가 교차로를 차례로 봉쇄한다. 날아든 하키의 퍽과 야구공을 신호탄으로, 태수는 혈로를 뚫기 시작한다. 이 장면들에서 은연중에 배어나는 정서는, 몰려다니는 10대들의 언어도 몸짓도 이해할 수 없는 중년 남자의 이질감과 공포다. 시퀀스 서두에서 광대처럼 표정을 가린 화장을 하고 물구나무 선 10대 비보이들의 기괴한 모습은 일격을 날리기 전부터 태수를 얼어붙게 한다. 이 아이들은 낯설기 때문에 적인 이족(異族)이다. 옛 친구 중 한 명인 건달 필호(이범수)는 영화 서두에 이렇게 말했다. “요새 애덜이 겁이 없잖여? 나도 제일로 무서운 게 애덜인데.” 10대들과 대결하는 태수와 석환의 싸움 기술은 전성기 성룡의 그것이다. 소화기, 입간판, 공사 바리케이드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휘두른다. 두 어른의 목표는 오직 살아남을 반경을 확보하는 것이다.

김혜리 / <씨네21> 편집위원
태수와 석환의 눈에 온성은 예전 고향이 아니다. 부동산 개발 광풍의 하수인이 된 10대들의 폭력에 비해 추억속 학교 대항 패싸움은 목가적이기까지 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간절한 청춘들과 달리 <짝패>의 10대들에게 사람을 때리는 행위는 마우스 클릭과 별 차이 없어 보인다. 감독의 전작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만 해도 도시를 질주하는 경박한 아이들은 희망이었다. 비록 장풍을 못 배워 혼자 영웅이 되진 못하지만, 비장한 표정 짓지 않고 단결하지 않아도 놀이하듯 세상을 바꿔나갈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 그러나 <짝패>의 거친 10대들은 더는 류승완의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탐욕이 만물을 집어삼키는 도시에서 과거의 소년인들 안전할 리 없다. 돈과 힘에 홀려 우정을 버린 친구에게 태수는 묻는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짝패>의 세계에서, 과거의 아이들은 부패했고 현재의 아이들은 괴물이다. 이 영화가 탄식 같은 욕설 한 마디로 끝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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