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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3 16:08 수정 : 2007.05.23 16:37

허시명

[매거진 Esc] 허시명의 알코올트래블
서울역 ‘트레인스’서 맛보는 부드러운 바이첸과 고소한 둥클레스

허시명씨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술 책만 벌써 몇 권 째다.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비주, 숨겨진 우리 술을 찾아서> 등 책 제목만 들어도 술맛 당긴다. 그는 왜 술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것일까? 알코올 속에는 무엇을 찾아내려는 것일까? 허시명씨가 이제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도 역시 술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그동안 한국의 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지금부터 떠날 여행에서는 전 세계의 술을 발견할 것이다. 맥주, 와인, 위스키 등 다양한 술 속에서 우리들 삶의 모습을 걸러낼 것이다. 그의 글과 함께 미련없이 떠나고, 기분 좋게 취하자.

여행작가라는 내 명함을 보면 대개들 부러워한다. 그런데 술기행까지 다닌다고 하면 입이 벌어진다. 상대가 주당이라면 눈빛이 달라지고 부당한 기색까지 띠는지라, 내 목이 움츠러들 지경이다. 새로 술기행을 떠난다. 지금 내가 가는 곳은 서울역이다. 현대인의 사망 원인으로 1위가 암이고 2위가 교통사고다. 음주운전은 교통사고로 직결된다. 음주운전을 피하면서 술을 마시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술기행에 가장 적합한 게 기차라고 여기는데, 술기행 기차여행 상품이 생겼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열차에서 마시게 고안된 월계관 술잔
기차를 타고 술 마시러 갈 수 있는 곳이 어디란 말인가? 많다. 장항선을 타면 서천의 소곡주, 경부선을 타면 김천 과하주, 호남선을 타면 정읍 죽력고, 중앙선을 타면 안동소주, 영동선을 타고가다 정선선을 갈아타면 정선 오가피주가 기다리고 있다. 아직은 술도가들이 손님맞이를 할 만큼 개방적이지도 적극적이지도 못하지만, 체험여행이나 맛기행이 인기를 얻어가고 있으니 머잖아 주당들에게 철로가 양조장 호스처럼 보일 날이 오리라.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하우스 맥줏집 트레인스. 찾아오는 손님에게만 맥주를 팔 수 있으니, 맛있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여행과 술은 언제든지 친해질 수 있는 사이다. 일본 청주회사 월계관은 철로가 놓이던 초창기에 열차의 덜컹거림에도 넘어지지 않는 술잔을 만들어 히트를 친 적이 있다. 위스키 조니워커 스윙은 1930년대에 대서양을 건너는 여행객들을 위해 흔들리는 유람선 안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고안된 술병이다.

오늘은 첫날이니 멀리 떠나지 않기로 한다. 떠나고 되돌아 오는 서울역, 바로 그곳에도 술꾼을 매료시킬 세상 단 하나의 술이 있기 때문이다.

2004년 고속철도 서울역사가 새로 생기면서, 서울역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1925년에 지어진 서울역 구청사는 새 단장할 날을 기다리고 있고, 신청사는 백화점과 전문식당가에다 대형마트까지 생겼다. 지방에서 오더라도, 서울역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곧바로 내려갈 수 있게 해두었다. 그 신청사의 주차장이 딸린 건물 2층에 하우스맥주 제조장인 ‘트레인스’가 있다.

하우스맥주는 소규모 맥주 제조장을 말한다. 맥주회사에 견주면 소규모지만, 음식점으로 치면 대규모다. 트레인스만 해도 자리가 300석이 넘고, 결혼식도 올릴 수 있는 곳이다. 트레인스의 맥주 제조 장비는 헝가리에서 들여 왔다. 아일랜드 출신 기술자 메투칼라한이 장비와 함께 들어와 2년 동안 트레인스에서 맥주를 담갔다. 그 밑에서 일한 윤진수씨가 지금은 전과정을 책임지는 브루마스터가 되었다. 윤진수씨는 젊지만, 동종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배우는 것보다 가르쳐주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트레인스에는 세 종류의 맥주를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대중화된 맥주 필스너와 고소한 흑맥주 둥클레스와 부드러운 밀맥주 바이첸이다. 2002년에 월드컵을 앞두고 하우스 맥줏집들이 문을 연 이래로 2005년 말까지 하우스 맥줏집이 112곳이 생겼다. 2002년에 결성된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도 회원사가 92곳이나 된다.

맥주를 제조하고 있다. 제조장비는 헝가리에서 들여왔다.

하우스맥주는 일반 생맥주보다 가격이 두 배고, 제조장 안에서만 팔게 되어 있다. 찾아오는 손님에게만 팔 수 있으니, 맛있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부드러운 밀맥주 바이첸을 한잔 마시고, 색이 진하고 맛이 고소한 흑맥주 둥클레스를 맛보려는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입가에 하얀 거품을 묻히며, 맛있게 맥주를 넘기던 사람 윤인우씨다. 그는 오비맥주 공장장을 지냈고 카프리를 만들었고, 직접 만든 맥주로 국제적인 상도 받은 장인이다. 그와 하우스 맥줏집을 순례하며 술맛을 품평해 보자고 약속했는데, 이제 이룰 수 없게 되었다. 2년 전 그가 직장암으로 세상을 버렸기 때문이다. 평생 맥주를 만들고 맥주를 좋아했으니 아마 직업병이었을 것이다.

‘카프리’를 만든 윤인우를 추모하다
하지만 윤 선생의 꿈 하나는 실현되었다. 그가 결성하고자 했던 양조과학회가 올해 3월에 출범했다. 지방에 거주하는 양조학자와 양조업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서울역 신청사 회의실에서 출범식이 있던 날, 회장으로 선임된 호서대 교수 염행철씨도 윤인우 선생 얘기를 했다. 한국양조과학회의 출범을 자축하던 뒤풀이가 하우스맥주 트레인스에서 있었다. 갓 빚어 향기로운 맥주를 건배하면서, 술만 넘쳐날 것이 아니라 양조기술도 넘쳐나기를 모두들 기원했다. / 여행작가, 술품평가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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