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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17 17:13 수정 : 2007.05.18 14:10

[매거진 Esc] 나의 도시이야기 / 그르노블

베르꼬르 계곡과 벨돈 산맥의 정기를 받아며 살았던 그르노블. 이후 3년간의 파리 생활보다 그 소도시에서의 3개월이 훨씬 자극적이었던 이유가 뭘까. 여행자 신분이 아니라 정착자로서 처음 딛은 곳이었기 때문일까. 데뷔 다음해인 2000년 6월에 그르노블에 도착했다.

스땅달은 <연애론>에서 세상의 모든 연애는 네 가지 단계를 밟는다고 말했다. 첫째가 관심, 둘째가 집착, 셋째가 강요, 넷째가 상실이다. 그르노블에 대한 나의 연애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바깥 세상을 접하면 차이점부터 눈에 띄기 마련이라 처음엔 트램(전차), 까르푸의 말고기, 대학 담벼락의 그래피티, 정기권 티켓의 디자인까지 그 모든 다른 것이 자극적으로 나를 흔들어댔다. 그 중 샤모니의 몽블랑은 단연 최고의 자극제였다. 4810미터의 유럽 최고봉을 창 밖으로 매일 본다는 건 믿기 힘든 경험이었다. 또한, 지도를 펼쳐놓고 충동적으로 내린 선택치고는 꽤 그럴싸하게도, 그로느블은 스탕달의 고향이며 내가 다니던 학교가 스탕달 대학이란 걸 알았을 땐 정말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프랑스로 가기 10년 전, 스탕달의 <적과 흑>에 감동한 후 한동안 그의 유언처럼,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를 묘비명으로 해달라고 떠들며, “난 백 년 후에나 유명해질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품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공연들이 시내 광장을 메웠던 유럽 연극축제의 마지막 날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빅토르 위고 광장에 모인 수천의 사람들 위로 거대한 크레인이 50미터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위에 모빌처럼 매달린 여섯 명의 연주자들이 곡예 연주를 했다. 그날 밤, 공연에 빼앗긴 허기를 채우려 뛰어가던 도중 갑자기 허리가 너무 아파 멈춰 서버렸다. 한 발자국을 떼는데 10분씩 걸릴만큼 격렬한 고통이었다. 1시간에 걸쳐 찾은 벤치 앞에 앉았을 때, 공기중의 밀도가 달라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 후에야,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동상이 우뚝 날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영화 <적과의 동침>에서 남편의 병적 폭력이 시작될 때면 울려나왔던 <환상교향곡>의 작곡가였던 것이다. 10년 전, 심장에 똑똑히 새겨졌던 예술가들의 흔적을 과히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할만한 혹독한 육체적 고통과 함께, 운명처럼 마주치고 있었다.

베를리오즈와의 인연은 동상에서 그치지 않았다. 얼마후, 에디트 피아프를 똑닮은 나의 불어교사가 그르노블 북서부의 집으로 날 초대했다. 때마침 그곳엔 베를리오즈 축제가 한창이었는데, 그날 밤, 연주회에 가서야 난 그곳이 베를리오즈의 고향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때, 환상교향곡의 온전한 연주를 듣고서, <적과의 동침>에게 빼앗긴 음악을 되찾은 기쁨이란….

허나 여행자가 아니라 정착자로서 딛게 된 도시는, 기실 오랜 놀라움을 주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서서히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보편적인 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난, 자신이 원하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열적으로 추구했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처럼 미련없이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타지인으로서의 고행을 행복하게 맞이하기 시작했다.

민규동/영화감독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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