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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4 07:18 수정 : 2019.12.14 08:54

[판을바꾸는언니들⑬마지막회] ‘판언니’ 에필로그

‘88올림픽’이 끝나고 태어났다. 스무살이 되던 해, 실력만 있으면 유리천장쯤은 부술 수 있다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서른이 되자 직장에선 자책감을, 가정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슈퍼우먼’ 선배들이 보였다. 여성의 생존과 성공에 대한 서사는 늘었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판의 기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 판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알파걸’도 ‘슈퍼우먼’도 주지 못한 답을 찾고 싶어, 또래 여성들을 만나러 나섰다.

1. 여성 소설가 모임 ‘왓에버’가 지난 9월 대전에서 연 페미니즘 북토크 행사 모습. 2. ‘판을 바꾸는 언니들’ 시리즈 첫 화 주인공인 고은영 녹색당 미세먼지 기후변화 대책위원장. 3. 여성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디자인에프엠(FM)’ 팟캐스트를 녹음 중인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 4. 올해 2월 중남미 여행 도중 박선욱 간호사 사망 1주기 집회 참석을 독려하기 위해 플래카드를 펼친 최원영 간호사. 5. 대전 명물 ‘명란바게트’처럼 “질기게 살아남겠다”고 밝힌 대전 여성주의 잡지 <보슈>

시작은 제주도였습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인상적인 결과를 남긴 고은영 녹색당 미세먼지 기후변화 대책위원장을 ‘판을 바꾸는 언니들’의 첫 타자로 인터뷰하기로 결심하고, 황금비 기자와 함께 카메라 두 대를 짊어지고 무턱대고 제주로 향한 것이 올해 1월의 일입니다. 이후 2019년 한 해 동안 제주, 전주, 대전으로 떠났고, 정치, 교육, 아이티(IT), 스타트업, 종교, 의료, 문화예술계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을 만났습니다. 12회 인터뷰에 등장한 인물만 21명입니다. (▶연재 바로가기 : ‘판을 바꾸는 언니들’)

# 기울어진 구조를 바꾸려는 여성들

‘판을 바꾸는 언니들’ 시리즈를 기획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알파걸’이나 ‘슈퍼우먼’처럼 그동안 언론이 젊은 여성을 조명하면서 사용한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성의 서사를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앞선 두 프레임은 보편화되기 어려운 개인의 특성을 전체로 확대하거나 여성 개인의 ‘노오력’에만 기대 구조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성공만을 좇기보다 기울어진 구조 자체에 집중하고 이를 바꾸려 노력하는 여성들, 여성들 간의 연결과 주체적인 연대를 통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여성들을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판을 바꾸는 언니들’을 섭외할 때 가장 고심했던 기준이기도 합니다.

처음 목표는 서울·경기권에 국한하지 않고 되도록 각 시·도의 여성을 두루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또는 잘 보여지지 않는 다양한 지역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쉽게도 아직 가보지 못한 지역이 더 많습니다. 강원도와 경상도에선 변화를 만들어내는 어떤 여성분들이 있는지 여전히 궁금합니다.

인터뷰이를 섭외할 때 또 다른 기준은 바로 ‘2030’ 여성이란 점입니다. 이 인터뷰 시리즈의 주된 독자층도 같은 연령대로 상정하고 “또래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콘셉트로 기사를 구성했습니다. 인터뷰 영상과 온라인으로 내보낸 기사에서 파격적으로(?) 반말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젊은 여성들에게 주목한 건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재점화된 과정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운동,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미투를 거치며 변화의 최전선에 서서 사회구조적 모순에 부닥치며 싸우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인터뷰에서 페미니스트 모먼트, 즉 ‘페미니스트임을 자각한 순간’을 꼭 물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 섭외에 실패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시기가 맞지 않아서, 연령대가 높아서 어긋난 경우도 있지만, 사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레 나눌 수밖에 없다 보니 “영상 촬영은 어려울 것 같다”고 답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악플’을 우려한 겁니다.

선뜻 인터뷰를 수락했더라도 생각보다 거센 댓글에 당황한 분들도 있었습니다. “비혼 여성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보슈>는 올 한 해 비혼 여성을 위한 각종 세미나와 모임을 꾸려왔는데요. 이번 인터뷰 이후 달린 ‘악플’을 보면서 “비혼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여성 소설가 모임 ‘왓에버’의 천희란 작가는 “페미니스트로서 댓글 공격을 받은 게 처음인데 처음엔 겁도 났지만 오히려 더 당당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자신의 강인함을 확인시켜줬던 경험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의 한경희 디자이너는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네요. (다음부턴 인터뷰이, 특히 여성 인터뷰이를 향한 근거없는 비난이나 모욕 행위에는 좀 더 적극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화를 앞두고 서로 다른 분야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건 처음 시리즈를 시작할 때부터 구상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각기 다른 인터뷰이들뿐만 아니라 이 시리즈를 읽은 독자들도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대하고 교류하는 장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지난달 30일 열린 ‘판을 바꾸는 언니들’ 토크쇼에 참석한 청중들은 “여성 10명으로 연단이 채워진 모습이 벅차다”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끈끈한 연대가 느껴지는 자리였다” “비슷한 고민과 비전을 나누고 생각하고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의견을 남겨주셨습니다. “남성들에게 맞서는 여성보다 당당하면서도 남성들을 품을 수 있는 여성을 보고 싶다” “20대 국회의 여성 관련 법안 통과 상황, 채용 성차별 문제도 다뤄달라”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는 여성 이슈를 많이 끌어올려달라” “여성이 일하기 흔치 않은 직업군에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숙제를 남겨주시기도 했고요.

# 후대의 여성을 위한 바람으로

매달 변화를 만들어내는 여성들을 만나는 자리는 제게도 매번 배우고 깨닫는 순간을 선물해줬습니다. 설령 그 속도가 더딜지라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분야가 다르고 각자 살아온 길이 달라도 비슷한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 여성이 이렇게나 많구나 싶어 놀라기도 했고요. 자신이 속한 업계에서 동료들을 찾고 그들과 연대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반성과 성찰을 하는 계기도 됐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먹고살기만도 충분히 벅차고 바쁩니다. 구태여 나서서 오랫동안 굳어진 관행과 관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큼 피로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럼에도 이들을 움직이는 건 아마 “나와 내 후대의 여성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일 겁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처럼, 여러 여성들이 만들어내는 한 걸음이 생각보다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낼 거란 기대를 품어봅니다.

1년 동안 ‘판을 바꾸는 언니들’ 연재를 통해 12번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판을 바꾸는 언니들’ 연재를 마칩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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