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이적표현물 판정한 뒤 권장도서 추천 1980년대 당시 정부에서 만들어 각 학교에 배포하고 언론에 홍보한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 중국의 <소녀경> 이 들어 있었다. <소녀경>은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중국 왕실의 방중술을 다룬 말 그대로의 성서(性書)다. 여고생들에게 중국 왕실의 방중술을 익히게 하려는 가상한 교육당국의 의도는, 권장도서를 만드는 정부당국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줬다. 정부당국의 ‘권장도서’ 코미디는 21세기가 되어서도 계속된다. 이번에 코미디 주연이 된 정부 당국은 ‘사상검증’을 하는 경찰청 산하 경찰대학과 공안문제연구소다. <태백산맥>, <자본론> 동시에 이적표현물이면서 권장도서?
경찰대 산하기관인 공안문제연구소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한 <태백산맥>, <자본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경찰대쪽이 권장도서로 선정한 사실이 알려져, 20여년 전의 논란을 재연하고 있다. 사상검증을 본업으로 하는 공안기관의 정신분열증인가? ‘이적표현물’이지만 정말로 경찰에게 추천할 만한 책인가? 경찰대학은 지난 20일 발행한 <우리는 분명히 변할 것입니다, 경찰대학 사람들>라는 홍보용 책자에서 경찰대 학생들을 위한 ‘청람 권장도서 100선’에 <자본론(상~하, 카를 마르크스)>, <태백산맥(1~10, 조정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을 권장도서로 뽑았다. 이번 권장도서는 경찰대 교수 등 7인의 선정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어서, 경찰 조직 사이에서도 ‘이적표현물’ 분류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권장도서 가운데는 ‘이적표현물’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국군기무사령부가 공안문제연구소에 사상감정을 의뢰한 <소크라테스의 변명>(플라톤)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김성호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막스 베버의 책은 마르크스의 대한 반론인데 그런 책을 찬양·동조라고 판단내릴 정도라면 감정의 신뢰성이 일관성이 의심스런 코미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권장도서 100권은 교수, 학생, 교직원 등 경찰대학 전 직원의 추천과 타대학의 추천도서 등을 참고하여 간추린 1077권의 추천도서 가운데 골랐으며, 철학 27종, 사회과학 37종, 문학 24조, 역사 8종, 문화예술 5종, 자연과학 2종이다. <프로테스탄티즘…>(막스 베버)는 기무사가 이적성 감정 의뢰하기도 이런 사실은 허창영 인권실천시민연대 간사가 <시민의 신문>쪽에 제보하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허 간사는 <시민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찰 한 쪽에서는 이적표현물이라는 책이 다른 쪽에서는 경찰대학생들에게 읽기를 권하는 책으로 선정된 것은 한마디로 아이러니”라며 “국가보안법과 이적표현물이라는 규정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반증하는 사례이자, 경찰 안에서도 이적표현물 딱지가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공안문제연구소는 지난 1988년 세워진 뒤,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등과 관련 뚜렷한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무리한 사상감정 결과를 법원 등에 제출해 시민단체 등의 비판을 받아왔다. 이때문에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은 “공안문제연구소가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증거물에 대해 감정서를 발급하는 것을 즉각 중단시키겠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대쪽은 “이번에 논란이 되면서 도서선정 과정 등을 확인하고 있다”며 “권장도서 목록의 외부배포는 중단했다”고 밝혔다. 금서목록이 ‘색인’(Index)이 된 까닭은? 80년대 군사정권 시절엔 추천도서와 함께 ‘금서(禁書)’목록이 존재했다. ‘금서’라는 말과 ‘색인’이라는 말의 어원은 한가지다. 지금 색인이라고 불리는 인덱스(Index)는 애초 로마 교황청이 금서목록으로 지정한 책들이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금지된 책들만을 늘 찾아 읽다보니, 금서목록이 닳고닳아 ‘금서목록’에서 ‘색인(index)’이 유래되었다. 경찰대학과 공안문제연구소의 자기모순적인 권장도서 추천과 이적표현물 규정은 수세기전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학설을 금지시켰던 시대착오와 닮았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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