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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2 17:42 수정 : 2005.01.02 17:42

2 ‘제3계급’ 비정규직

#절망

울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인 이승렬(건조 2부)씨는 오후 5시면 ‘칼퇴근’을 한다. 잔업이나 특근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해서가 아니다. 지난 5월 복직한 뒤 회사의 ‘잔업 통제’가 심해진 탓이다. “눈밖에 난 사람은 잔업 특근 못합니다. 덕분에 몸은 편해졌지만, 월급 봉투는 훨씬 얇아졌죠.”

이씨는 지난해 초 같은 하청 노동자 박일수씨의 분신 이후 노조와 대책위 활동을 하다 해고됐다가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복직했다. 이씨처럼 ‘커밍아웃’한 하청 노조원은 손으로 꼽힌다. 개별적으로 해고당한 하청 노조원은 5명에 불과하지만, “노조원이 많은 곳은 회사가 하청업체 자체를 날려버리는 방식을 쓰기 때문에” 몸을 사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노조원은 300명 안팎에 이르지만 초기 발기인과 해고자들이 근근히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접었다. 박일수씨 사건을 계기로 공정거래위원회와 노동부가 2달 동안 대대적인 위장도급 실태조사를 벌였지만, 원청업체의 불법 행위는 1건도 적발하지 못했다. 조성웅 하청노조 위원장은 “선박 건조의 특성상 같은 일을 조각조각 떼어 하청 또는 직영에 맡기는데, 필드가 다르니까 도급이라는 업체들의 주장을 (정부가) 모두 받아줬다”고 말했다.

90년대 초 ‘골리앗 투쟁’으로 노동운동의 상징이던 현대중공업은 1995년 이후 10년째 무분규 기록을 이어오고 있다. 언론은 이런 ‘골리앗의 변신’을 “노조가 붉은 머리띠를 풀었다”며 노사 상생의 모범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상생의 이면에는 1만4천여명에 이르는 하청 노동자의 한숨과 절망이 깔려 있다. 현대중공업은 박일수씨 분신 사건을 두고 정규직 노조와 대책위가 극심한 갈등을 빚다 결국 민주노총이 노조를 제명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조 위원장은 “회사 사수대로 동원된 정규직들이 농성을 해산하는 데 앞장서고, 심지어 끌려가는 비정규직 동료들을 비웃는 상황을 보면서 분노를 넘어 절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분노

지난달 30일 오후 울산 현대자동차 본공장에선 불법파견 철폐를 요구하는 보고대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는 현대차 정규직 노조원과 하청 노조원들이 나란히 참석해 “불법파견 철폐, 정규직화 쟁취”를 함께 외쳤다.

현대차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올봄 원청 노조의 진정에 따라 주요 사업장에서 잇따라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지면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지난 9월 울산·아산공장 21개 하청업체 1800여명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시작으로, 10월에는 전주공장 12개 업체 900명, 12월에는 울산 공장 101개 하청업체 8396명에 대해 무더기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졌다. 현대차 전체 하청 노동자 1만5천명의 3분의2를 웃도는 규모다. 현대차는 이달 10일까지 노동부의 시정명령에 따른 개선안을 내놔야 한다.





불법파견을 인정받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대부분의 하청 노조 간부들이 고소고발로 수배되거나 공장 출입이 금지됐다. 울산공장은 하청 노조 간부와 조합원 18명에 대해 집회 및 시위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오민규 기획교섭전문위원은 “노조 사무국장은 최근 노조 사무실로 출근하다 연행, 구속됐고, 부위원장은 1년째 수감중이다. 수배중인 위원장은 1년째 회사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공장 안에서 맞교대 하면서 조합 활동을 하고 있다. 밖에 있는 사람은 나 하난데 출입정지 가처분 결정이 내려져 공장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금속산업연맹 추산에 따르면, 현대차의 울산·아산·전주공장의 생산직 사내하청은 모두 1만5091명으로 불과 2년새 2배 이상 늘었다. 정부의 시정명령을 그대로 따르려면 2년 이상된 비정규직 6천여명 가량을 모두 직접 고용으로 바꿔야 한다.

회사 뿐 아니라 원청 노조의 고민도 깊다. 모두 정규직화를 주장하기에는 그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행정소송 등 지리한 법적 공방으로 흐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규호 노조 홍보부장은 “아직까지 회사쪽이 개선안을 내놓지 않았지만, 시정명령을 그대로 이행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어쨌건 우리는 원·하청 노조가 연대해 해법을 찾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은 희망

“잘 될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싸워봐야죠. 계약 연장이 우리 목표는 아니었으니까요”

새마을호 여승무원 윤은선(28)씨는 지난해 말 생전 처음 머리띠를 두르고 집회에 참석하고 서명을 받으러 뛰어다녔다. 힘겨운 연말을 보냈지만 ‘작은 승리’도 얻었다.

지난해 12월31일자로 계약 해지될 처지였던 윤씨 등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 31명은 지난달 14일 철도청으로부터 ‘승무 또는 역무직으로 1년간 재계약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철도청은 지난해 봄 근무기간이 2년 이상인 계약직 여승무원 모두에게 2004년 말일자로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신규 채용을 강행해 대기시켰다. 그 전해에 ‘새마을호 계약직 여승무원은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노조와의 합의는 휴지 조각이 됐다. 구조조정이나 징계가 아니라면 결국 3년 이상 장기고용해야 할 계약직의 정규직화 부담을 덜기 위한 수순이었다.

장순옥 여승무원회 회장은 “계약이 끝나면 역무직 전환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을 흘렸습니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고, 밉보이면 전환이 안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냉가슴만 앓았죠”라고 했다. 자신들을 대체할 신규 채용 계약직의 수습 훈련까지 맡아야 했다.

근무 시간이 지역에 따라 달라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들었지만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철도노조 서울본부도 힘을 보탰다. “처음 모이고, 벽보 붙이고 리본 달고…. 철도노조가 여러차례 함께 협의하고 도와주겠다고 해서 투쟁에 나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한 관계자는 “새마을호 여승무원 뿐 아니라 근로복지공단 일용직,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경찰 고용직 공무원 등 공공부문 비정규직 상당수가 정부의 약속과 달리 직권면직이나 계약해지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세밑을 앞둔 지난달 28일에도 이 여승무원들은 철도노조 조합원들과 함께 ‘정규직화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또 1년이 지나면 계약이 해지되는데 정규직화는 몇년이 걸릴 지도 모르잖아요. 다시는 똑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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