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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6 19:54 수정 : 2020.01.07 02:35

연재ㅣ10대들의 내가 지키는 나

지혜롭게 화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면 잘못된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지혜롭게’를 ‘공정하게’로 바꾸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정하다는 것은 같은 규칙을 적용한다는 뜻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나이는 10대, 성별은 여자. 나이 차별에 성차별까지 함께 경험하는 때. 말하고, 거절하고, 바꾸고, 저항하겠다고 결심했다면 이제는 자신과 새롭게 만나야 한다. 언제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왔을까? 혹시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외침조차 듣지 않도록 길러진 것은 아닐까? ‘여자답게’라는 말은 왜 이리도 ‘지혜롭게’라는 단어와 달라붙어 있는 걸까?

아주 어릴 때는 “네 장난감 내가 가지고 놀아도 돼?” 하고 묻는 것을 배웠고, 상대방이 뿌리치면 그만두어야 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마음이 편안한지 살피고,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갔다. 누구나 서로에게 그래야 하는 거라고 배웠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싫다는데도 억지로 뽀뽀하려는 친척 어른들에게 “하지 마세요!”라고 말할라치면 “예뻐서 그러시는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을까.

위협하는 몸짓으로 다가왔던 친구를 보고 벌떡 일어서며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하면서 나를 누그러뜨리려고 했을까? 왜 말로 몸짓으로 화를 내지 못하게 하고, 더 이상 참지 못해 눈물을 흘릴 때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을까? 내 감정과 생각은 완전히 무시하고 꾹 참으라는 건가? 그만두라는 말을 부드럽게 하라는 건가? 그 자리에서 표현하지 말고 나중에 말하라는 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해보라는 건가? 화를 내지 말고 부탁을 해보라는 걸까?

이제 그 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듣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되었을 수도 있다. ‘지혜롭게 화를 낼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이 그것이다. 원래 지혜(智慧)는 매우 지적이면서 동시에 문제해결적인 상태를 뜻한다. 최고의 균형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혜롭게 화내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타인의 욕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라”는 말을 에둘러서 그렇게 표현한다. 지혜라는 말을 오염시켜 버렸다.

자신의 욕구뿐만 아니라 타인의 욕구에 대해서도 경청하는 것은 단단한 땅 위에 지은 집과 같다. 타인의 욕구를 알기란 쉽지 않다. 좋은 태도를 가지고 묻고 듣는 것이 가장 좋다. 또 말뿐만 아니라 몸짓을 읽어내고 나아가 상대방이 놓인 현실에 대해서도 알아차리려 하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여기 정말 이상한 장면이 있다. 자신의 욕구는 무시하면서 타인의 욕구에만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허공 위에 지은 집이다. 1층이 없는 2층이고, 착륙지가 없는 비행기다.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타인의 욕구가 아니라 나의 욕구이다. 상대방의 욕구를 파악하는 일은 그다음에 할 일이다.

지혜롭게 화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면 잘못된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지혜롭게’를 ‘공정하게’로 바꾸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정하다는 것은 같은 규칙을 적용한다는 뜻이다. 그런다고 모든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 욕구는 충돌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같이 놀고 싶은데 친구는 할 일이 있다고 하고, 나는 반가운 인사만 나누고 싶은데 그 선생님은 등허리를 쓰다듬고 싶어 한다. 나는 청한 적도 없는데 내 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한다.

애초에 누구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서로가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 놓여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욕구가 충돌할 때, 협상하고 타협하거나 거부하는 일련의 과정이 펼쳐진다. 친밀하고 신뢰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저 깊은 곳에서 다시 한번 ‘지혜롭게’라는 명령이 들려온다면 단호하게 뿌리치자. 이제 ‘공정하게’ 화를 내겠다고.

문미정 ㅣ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공저자

※오늘부터 문미정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의 ‘10대들의 내가 지키는 나’ 칼럼이 격주로 실립니다. 청소년들이 몸과 마음의 힘으로 거절하고 요구하는 법, 반(反)성폭력, 연대의 힘에 관한 내용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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