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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29 08:00 수정 : 2019.07.29 09:34

[더 나은 사회] 유행처럼 번지는 지역화폐 ②
커뮤니티 활성화 ‘특효약’ 바람 타고 급증
10개 중 7개꼴 사라져…운영 조직 취약 탓
전자 지역화폐 형태로 다시 확산 조짐
영국 ‘브리스틀파운드’, 성공사례 꼽혀
유럽연합, 6개 지역화폐 지원 등 실험

2004년 4월 탄생한 아톰통화는 올해로 15년째가 되는 일본의 ‘장수 지역화폐’로 도쿄 등 전국 5개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다. 아톰통화 누리집
일본 와세다대학이 있는 도쿄 다카다노바바 지역에 가면 아톰이 그려진 종이화폐로 밥을 사 먹고 쇼핑도 할 수 있다. 아톰은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가 1952년 그린 ‘철완 아톰’의 주인공 이름이다. 한국에선 1980년대 ‘우주소년 아톰’이란 제목으로 텔레비전에 방영되면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2004년 4월 탄생한 아톰통화는 올해로 15년째 되는 일본의 ‘장수 지역화폐’다. 이시와타 마사토 아톰통화실행위원회 부회장(데즈카 프로덕션 크리에이티브부장)은 <한겨레>와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아톰을 만든 데즈카 프로덕션 본사가 있는 다카다노바바의 사람들은 데즈카 오사무와 그의 작품을 굉장히 소중히 생각한다. 역 근처에 캐릭터 벽화가 설치되고, 열차 출발 음악도 아톰”이라며 “이 모든 것은 지역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여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와타 부회장은 “우리도 뭔가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해 상점가 연합회, 와세다대학 자원봉사센터 등과 협력해 아톰통화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아톰통화, 15년 된 장수 지역화폐

‘감사의 돈’으로 불리는 아톰통화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좋은 일’을 해야만 받을 수 있다. 아톰통화실행위원회가 화폐를 발행하는데, 지역주민들은 에코 가방, 개인 젓가락 사용하기, 페트병 회수, 지역 농산물 부활 등 환경·지역·국제·교육 관련 이벤트나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아톰통화를 받을 수 있다. 아톰통화는 10마력, 50마력, 100마력, 500마력 네종류로, 1마력은 1엔의 가치를 지닌다. 디자인은 해마다 바뀌고 유효기간은 매년 4월7일부터 다음해 2월 말까지다. 도쿄 등 전국 5곳 지역 가맹점 1천곳에서 사용할 수 있다. 아톰통화의 디자인이 예뻐서 사용하지 않고 기념품으로 간직하는 사람도 많다. 발행 규모는 1년에 2천만엔(한국 돈 2억원) 정도다. 이시와타 부회장은 “아톰통화를 도입한 것만으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폭넓은 지역 그룹들이 아톰통화를 축으로 얼마나 적극적인 활동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톰통화는 10마력, 50마력, 100마력, 500마력 네종류로 1마력은 1엔의 가치를 지닌다. 디자인은 해마다 바뀌고 유효기간은 매년 4월7일부터 다음에 2월 말까지다. 아톰통화 트위터
아톰통화와 같은 지역화폐(지역통화)는 2000년 초반까지 일본에서 급속히 퍼졌다. 불황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지역화폐가 지역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는 ‘특효약’으로 주목받으면서 유행처럼 번졌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낸 ‘지역통화 현황과 앞으로’(2018년) 보고서를 보면, 소규모 공동체 중심으로 붐이 불면서 2005년 일시적으로 지역화폐가 전국에 약 3000개까지 됐다가 현재 800여개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당시 지역화폐 대부분이 지폐 방식이었는데 발행·관리·환금 등에 필요한 인력, 예산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라진 곳이 많다”고 분석했다. 지역화폐를 운영했던 조직이 그만큼 취약했다는 의미다.

주춤하던 일본 지역화폐는 모바일이나 카드 등 전자 지역화폐 형태로 최근 들어 다시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시민사회·상점가·기업·지방자치단체 등 지역화폐를 운영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커뮤니티·관광·지역경제 활성화 등 목적도 다양해지는 추세다. 다시 확산 조짐을 보이는 지역화폐가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활용 수단을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고서를 쓴 가와바타 가즈마 국립국회도서관 재정금융과 담당자는 “지금까지는 지역화폐가 개개인의 소비 활동과 상호 부조에 이용돼왔지만 기업 간 거래나 노동자의 임금, 세금을 지역화폐로 냈을 때 세금 우대 조치를 해주는 등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 3000종 지역화폐 사용

지역화폐는 한국·일본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세계에서 3000종 이상이 사용되고 있다. 발행 목적, 방식 등 지역의 상황과 커뮤니티 성격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다. 이 가운데 영국의 브리스틀파운드는 대표적인 지역화폐 성공 사례로 꼽힌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쳐 지역경제가 위축되자 자금의 역외 유출을 막고, 지역 내 소매점과 시장에 돈을 돌게 하기 위해 2012년부터 시작한 브리스틀파운드는 소규모 공동체가 아닌 시 차원의 지역화폐다. 브리스틀시의 인구는 외곽지역을 포함할 경우 100만명가량 된다. 지역화폐 운영은 우리나라 사회적기업과 유사한 형태인 지역공동체기업이 담당한다. 민간이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시 정부가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지원을 해주는 시스템이다. 브리스틀 시장은 급여 전액을, 시 직원들은 급여 일부를 지역화폐로 받고, 지방세와 에너지 요금의 일부를 브리스틀파운드로 납부할 수 있도록 제도도 개선됐다.

영국의 지역화폐인 브리스틀파운드.
유럽연합(EU)도 지역화폐 실험에 적극적이다. ‘지역화폐 행동’(CCIA)은 유럽연합의 기금을 받아 지역화폐를 시행하는 조직들의 연합체로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유럽 내 6개 지역화폐 실험을 지원하고 있다. 프랑스 낭트시에서 발행되는 지역화폐 ‘소낭트’는 대표적인 모델이다. 대기업을 제외한 낭트시, 전문가, 학생, 노동자, 사업자 등 모든 경제주체가 참여해 4년을 준비했고 2013년 ‘지역화폐 행동’의 시범사업으로 선정된 뒤 2015년부터 사용을 시작했다. 종이화폐는 없고 신용카드, 온라인 결제, 스마트폰 앱 결제만 가능하다. 이 밖에 네덜란드 ‘트레이드코인’, 영국 ‘스파이스 타임 크레디트’, 벨기에 ‘E-포르트모네’ 등도 대표적인 지역화폐다. 유럽연합은 “지역화폐가 기존 수익 중심 화폐와 경제에 매이지 않고 시간과 상품을 교환하는 새로운 방법이 될 것이며, 유로나 파운드에 의존하지 않고도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이 연결될 수 있어 공동체 형성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지역화폐, 지역간 경제 불균형 해소 수단 될 것”

인터뷰 문진수 서울신용보증재단 상임이사

“경기불황 지역화폐 계속 생길 것”

“한가지 화폐만 존재 고정관념”

“법정화폐 도와 사각지대 메울 것”

“저성장 등 경기침체 국면이 심화하면 돈은 지금보다 더 돌지 않게 된다. 지역화폐·대안화폐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다.”

대안화폐를 다룬 <돈의 반란> 저자인 문진수 서울신용보증재단 상임이사는 “화폐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대안화폐는 모두 법정화폐가 아주 귀하거나 구할 수 없을 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며 이렇게 말했다. 문 이사는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장을 지내는 등 국내외 대안화폐를 연구한 전문가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그를 만났다.

문진수 서울신용보증재단 상임이사
-지역화폐 역사를 보면 해외는 200년 가까이 됐고 우리는 20년 정도 된 것 같다. 지역화폐가 많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한마디로 돈이 잘 돌지 않아서다. 경기가 나쁘면 지역화폐가 만들어지는 등 경기 상황과 지역화폐의 흐름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불황·대공황 시기 미국과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돈을 만들었고, 가진 것을 교환했다. 필요가 수단을 낳은 것이다. 효과도 컸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6년 <녹색평론>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 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지역화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방정부 주도로 지역화폐가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있고, 중앙정부도 재정 지원에 나섰다. 이런 흐름을 어떻게 보나?

“중앙·지방정부가 재정정책의 수단으로 지역화폐를 활용하고 있다. 몇몇 지자체의 경우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의 매출이 증가하고 있는 만큼, 이들에게 지역화폐는 상당히 중요한 도구가 됐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이다. 정부가 언제까지 재정 지원을 계속할지 알 수 없다. 또 지금의 방식은 상대적으로 재정 여력이 좋은 곳은 지역화폐 발행이 늘어나고 그렇지 않은 곳은 도입이 어려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지역화폐가 더 필요한 곳은 재정 자립도가 낮은 곳이지 않겠는가. 정부가 지역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맞춤형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단순히 할인을 해주니까 지역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곳이 좀 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지역화폐가 필요하다는 공동체 가치가 있어야 지속할 수 있다고 본다.

“지역화폐가 공동체 가치를 지키면서 지역경제도 활성화할 수 있으려면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중심에 서야 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영국 지역화폐 ‘브리스틀파운드’도 사업을 이끄는 것은 사회적기업이다. 우리나라에선 경기도 시흥이 모범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한다.(※시흥은 시민사회와 지방정부가 2년 동안 준비해 지난해 9월 지역화폐를 만들었다. 지방정부와 시민사회 30인으로 구성된 ‘시흥화폐 발행위원회’가 지역화폐에 대한 모든 것을 논의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협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법정화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에서 나온 지역화폐 보고서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다. 지역경제 자립성보다 공동체 의식 함양 등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분위기다. 현재 정부 주도의 지역화폐 활성화에 대한 비판도 읽힌다.

“지역화폐는 보완재에 가깝다. 법정화폐가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면 지역화폐가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지역 소득의 역외유출 문제가 심각하다. 지역 안에서 만들어진 부가가치가 계속해서 밖으로 빠져나가 지역경제가 피폐해지는 현상은 바로잡아야 한다. 지역화폐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긴 어렵겠지만 돈의 지역 간 불균형을 해소해주는 수단은 될 수 있다. 한 국가에서 오직 한가지 화폐만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일 뿐이다. 지역화폐가 법정화폐를 도와 돈의 사각지대를 메울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김소연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수석연구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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