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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1 19:31 수정 : 2005.12.21 23:29

[우리의 아이들 사회가 키우자] ② 재개발지구에서 만난 윤경 남매


쉼터생활 두달…몸도 마음도 조금씩 안정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내는 데서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일쑤다. 또 아이를 돕는 일사불란한 제도적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로, 부스러기 사랑나눔회 소속의 사회복지사 이신옥(28)씨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한 남매를 발견해 1년여 돌봐온 경험을 재구성해 소개한다.

정신질환 엄마, 알콜중독 아빠…제때 못먹어 배탈에 심장병까지

#2004년 여름, 겨울옷을 입은 아이

우리의 아이들 사회가 키우자
내가 윤경이(9)와 윤겸이(7·가명)를 처음 ‘발견’한 것은 지난해 6월 초 인천의 한 재개발 예정지구에 있는 놀이터에서였다. 따가운 햇볕 아래, 윤경이는 소매가 없는 원피스 아래 두툼한 바지를 껴입고 있었다. 비쩍 마른 체구에 머리카락을 짧게 깎아 첫 눈엔 남자아이 같았다. 동생 윤겸이도 땟국물이 흐르기는 마찬가지였고, 눈이 심한 사시였다. 잠시 뒤 아이들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아랑곳없이 노는 아이들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집으로 데려갔다.

남매는 빈곤층 아이들을 보살피는 이 지역 ‘공부방’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며칠 뒤 근처 골목길에서 아버지가 끄는 손수레에 타고 있는 윤경이를 다시 만났다. 40대 초반인데도 초로의 노인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윤경이는 내 손에 들린 공부방 아이들 간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버지가 “얘는 이런 것 먹을 형편이 안 돼”라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아이들을 공부방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가끔씩 공부방에 들르던 아이들은 피자 같은 간식을 주면 탈이 날 정도로 허겁지겁 먹었다. 이름을 물으면 불명확한 발음으로 대답하곤 했는데, 거듭 물어보면 씩 웃기만 했다. 다시 대답해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학교 선생님은 “초등학교 1학년인데도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의 집안 사정은 잘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동사무소에서 자활근로를 하고 있었는데, 동사무소 직원도 어머니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은 느끼면서도 아이들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었다.

#2004년 겨울, 쉼터를 찾지 못한 아이

아이의 집을 찾아가자 끔찍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대낮인데도 이불이 켜켜이 그대로 깔려있고, 강아지가 싸놓은 오줌 때문에 눅눅했다. 아이고 어른이고, 멀리 떨어진 화장실 대신 문밖 개수대에 소변을 보는 바람에 문틈에도 소변이 고여 있었다. 아이들은 야뇨증까지 있었다. 정서불안으로 생기는 증상이다. 냉장고 안엔 김치가 썩고 있었다. 돈이 생기면 음식을 배달시켜 먹거나 인스턴트 식품을 불규칙하게 먹이는 바람에 아이들은 배탈이 잦았다. 아이들은 제 나이보다 두세살은 어려 보였다.

아버지는 예상대로 알코올 중독이었고, 어머니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국수공장에서 숙련공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구제금융 무렵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실직했고, 프레스공으로 취직했다가 양쪽 엄지 손가락을 잃었다. 어머니는 가끔씩 아버지와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겨울이 왔지만, 보일러는 켜지 못하고 전기장판에만 의지해야 했다. 지붕에도 틈이 벌어져 무너질 위험마저 있었다. 아이들이 겨울만이라도 안락한 쉼터에서 날 수 있도록 아동학대예방센터에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정원이 6~7명에 불과한 쉼터엔 빈자리가 없었다. 아동학대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도 밀렸다. 이 남매가 겪는 ‘방임’도 아동학대의 한 유형이지만, 아직 이런 아이들을 돌보는 제도가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2005년 봄, 뒤늦게 치료받은 아이

건강 검진을 해봤더니, 윤경이에게서 동맥협착증이란 심장병이 발견됐다. 아이는 병을 지닌 줄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병원과 후원단체를 수소문해 지난 3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를 간호할 사람도 마땅히 없어 자활후견 기관에 의뢰해 무료 간병도우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윤겸이는 시력 차이에 따른 사시 치료를 위해 눈가리개를 규칙적으로 써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답답해하는 아이를 늘 곁에서 챙겨줄 사람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보육원서 첫눈 맞은 아이들
‘하얀마음’ 되찾을 수 있길

그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도 치료를 받았다.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도록 주선했고, 어머니도 정신과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다가 지난 5월부터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아버지는 입원하면서 생활비 관리를 내게 맡겼다. 동사무소에서 지원되는 생계비와 각종 후원금을 어머니가 절제 없이 쓸 것을 걱정해서였다. 어머니가 자활근로로 버는 30만원 가량과 동사무소에서 지급되는 35만원 가량의 생계급여가 안정된 수입의 전부였다.

#2005년 여름,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아이

어머니마저 입원한 뒤 남매는 아동학대예방센터 쉼터에서 임시로 두 달을 지냈다. 처음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불안해했지만, 깨끗한 시설에서 식사도 규칙적으로 하고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어른들을 대하자 점차 적응해갔다. 남매 모두 야뇨증이 사라지고, 몸도 부쩍 자랐다. 이제 노래도 제법 흥얼거릴 줄 알게 됐다. 한글을 읽고 간단한 셈을 할 정도로 공부도 늘었다.

부모의 입원 치료가 길어지면서 지난 8월 두 아이는 한 보육원에 맡겨졌다.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가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그동안 제대로 양육받지 못하면서 가슴 한쪽에 쌓여갔던 마음의 병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

#2005년 겨울, 하얀 눈 속을 뛰노는 아이

비참한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책임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아버지는 장애와 실직과 알코올 의존의 악순환을 헤어나오지 못했을 뿐이고,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앓아온 정신의 병을 치료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설령 이들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비난한다고 하더라도, 윤경이와 윤겸이는 무구한 어린이일 뿐이다.

쏟아지는 첫눈을 맞으며 보육원 마당을 뛰놀았을 아이들. 지난해 그날 이 아이들이 ‘발견’되지 않았으면 이 겨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들에겐 부모의 돌봄 속에 예쁜 꿈을 키워갈 권리가 있다. 부모가 돌볼 수 없다면 누구라도 이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이 사회가 짊어진 책임이다.특별취재팀

‘어린이 방임’ 처벌 규정도 없어…신고 의존 말고 직접 찾아나서야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어린이가 있더라도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으면 제도적 보호를 받을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보호가 필요한 어린이를 찾아내는 체계가 가장 시급한 대책이라고 지적한다.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빈곤층 어린이 가운데는 이처럼 당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를 제대로 양육하지 않는 ‘방임’을 아동학대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짙은데다, 교사·의료인·사회복지사 등 신고 의무자를 처벌하는 법규정도 없어 적극적인 발견과 신고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선 지원단체에서는 결식아동 명단 등을 바탕으로 가정환경 조사를 벌여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를 찾아내고 있지만, 부족한 인력 탓에 이런 활동은 부분적으로 이뤄질 뿐이다. 또 학교를 다니지 않는 영유아들은 아예 이런 기초적인 정보망에도 잡히지 않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아동 방임 가능성이 높은 가구들을 대상으로 사회복지사와 간호사가 가정방문을 실시하는 등 보호가 필요한 어린이를 직접 발굴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민간 차원에서 이런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부스러기사랑나눔회에서는 지난 6년 동안 연인원 50여명의 사회복지사를 빈곤지역에 파견해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를 찾아내는 사업을 벌여왔다. 그러나 잠재적 위험 속에 놓여있는 빈곤층 어린이의 규모를 감안하면, 민간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단체의 허인영 부장은 “이런 찾아가는 시스템이 정부의 제도적인 보장 아래 빈곤 아동과 가족을 위한 중요한 체계로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후원문의:부스러기사랑나눔회(www.busrugy.or.kr), 02-365-1265

후원계좌: 부스러기사랑나눔회 조흥은행 308-01-164508

어린이가 방치돼있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데서 비극이 출발합니다. 주위에 보살피는 어른이 없거나 위기에 빠진 어린이가 있으면, <한겨레>로 알려주십시오. 또 이런 어린이들을 돕고 있는 분들은 정부나 이웃으로부터 어떤 도움이 더 필요한 지 알려주십시오. 정책에 대한 제안도 환영합니다. 접수된 내용은 관계기관에 전달하는 한편, 후속 기사 준비에 소중하게 활용하겠습니다.

주소: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16-25 우편번호 121-750 한겨레신문사

편집국 어린이 특별취재팀

이메일 주소: chil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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