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르포
재일동포 양심수들의 사은행사
재심무죄 받은 재일동포 양심수들
도움 준 변호사·책 저자 등 초청
도쿄·오사카 출판기념회 등 열어
“간첩 낙인 떼고 살게 해줘 감사”
독재정권때 간첩 조작됐던 피해자
130여명 중 현재까지 40명만 재심
“재일동포 특별법 만들어야 하나
우선 대통령의 따뜻한 말 듣고파”
|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때 간첩으로 조작됐던 재일동포 피해자 중 현재까지 33명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다. 이를 중간 결산하는 차원에서 재일동포 양심수들은 지난 22일과 24일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조국이 버린 사람들>(저자 김효순·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일본어판 출판기념회 등 기념행사를 가졌다. 오사카 행사가 끝난 뒤 이철(둘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김원중(둘째줄 왼쪽에서 두번째)씨 등 재일동포 양심수들과 이석태(맨뒷줄 중앙), 심재환(이석태 오른쪽) 변호사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이철 대표 등 재일동포 양심수와, 이들을 도왔던 재심 변호사 등 한국에서 건너간 인사들이 함께 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조국이 버린 사람들> 일본어판 출판기념회와 강연회, 만찬 등의 모임이 때로는 성대하게 때로는 조촐하게 진행됐다. 이 특별한 행사를 동행 취재했다.
“언제 사형될지 모르는 사람이 도리어 나를 걱정해 주면서...”
유영수(69·이하 호칭 생략)씨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김원중(67)의 눈에도 어느새 물기가 가득했다. 사회를 맡았던 이철(70)을 비롯해 강종헌(67)과 서성수(67), 이종수(60)도 고개를 들어 눈을 껌벅이거나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모두 조국에서 간첩으로 몰려 오래 옥살이 했던 재일동포 양심수들이었다.
“서대문구치소에 이철, 강종헌과 함께 있었는데 나와 강종헌은 위 아래층에서 지냈다. 내가 기침을 심하게 하니까 강종헌이 ‘형, 단순한 기침이 아니야. 꼭 진료를 받아봐’라고 했다. 그 자신이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를 때였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한창이던 1977년 4월 부산대 대학원에 유학 중이던 유영수는 민주주의와 통일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느꼈다.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찼던 그는 친한 친구의 숙부였던 육군포병학교 교장(박승옥)을 찾아가 “북한군의 고위 장성들과 협의하여 통일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건넸다. 그는 그 자리에서 군 보안사령부(보안사)에 끌려가 간첩으로 만들어졌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받은 모진 고문 탓에 그는 배에 물이 차면서 호흡 곤란까지 겪고 있었다. 뱃속이 썩어들어가는 상황이었지만, 고문에 무릎 꿇었다는 자책감에 유영수는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그때,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수였던 이철과 강종헌이 제발 진료를 받으라고 유영수를 다그쳤다.
|
<조국이 버린 사람들> 일본어판 출판기념회를 추진한 이철(오른쪽), 김원중(왼쪽)씨가 저자인 김효순 전 한겨레신문 편집인과 지난 23일 오전 도쿄의 한 호텔 로비에서 포즈를 취했다. 목도리는 서울 정릉1동의 ‘성가 소비녀회’ 수녀들이 연대의 마음을 담아 재일동포 양심수들에 주려고 직접 짰다.
|
|
서울 정릉1동의 ‘성가 소비녀회’ 수녀들이 재일동포 양심수에게 주기 위해 뜨개질로 직접 짠 목도리(50개)와 위로와 연대의 뜻을 적은 편지.
|
<조국이 버린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
지난 23일 저녁 일본 오사카시 외곽 이시키리 마을의 한 온천호텔에 모인 재일동포 양심수들은 유영수의 회고에 소리없이 흐느꼈다. 이날 모임은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 양심수들이 자신들에 관한 책인 <조국이 버린 사람들>의 일본어판 출판기념회(22일 도쿄, 24일 오사카)를 여는 것을 계기로 마련됐다. ‘조국이 버린’ 자신들을 껴안아 준 이들을 위한 작지만 특별한 사은 행사였다. 재심 변호를 맡았던 심재환, 장경욱, 이상희, 조영선, 송상교, 신윤경, 최용근 등 변호사들과,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 조사 때부터 함께 해왔던 김영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등 시민단체 관계자, <조국이 버린 사람들>을 쓴 김효순과 출판사 관계자 강영선(서해문집), 세키 마사노리(아카시서점·明石書店) 등이 초청됐다.
이번 행사를 추진했던 이철은 “처음엔 저도 재심할 마음이 없었는데 여러분의 설득에 재심을 했고, 이런 기쁜 자리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힘써준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먼 길을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유영수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교도소 운동시간에 라이터 돌(담뱃불을 붙이는데 필요한 작은 부싯돌)을 찾아 다녔던 이철의 일화로 좌중을 웃긴 뒤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렇게 낙관적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남아 여러분 도움으로 무죄를 받았다. 덕분에 앞으로 떳떳하게 살게 됐다.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국에 의해 버려졌던 이들이 겪은 아픔의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서 묻어났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3년 보안사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됐던 서성수는 “그동안 일부러 모든 것을 망각하려고 노력해왔지만, 단 하나만은 잊지 않으려 애썼다. 서울구치소의 죄수 번호 126번이다. 늘 상기하려고 ‘서대문 126’을 제 이메일 아이디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가 되려고 서울대 의대에 다니다가 간첩으로 몰렸던 강종헌은 “조국은 국보법을 걸어서 우리를 버렸지만 저는 스스로를 나라의 보물 즉 국보라고 생각하면서 사형수 시절을 버텼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간 이들은 재일동포 양심수들의 아픔을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김효순은 “3년 전 책을 낼 때는 이렇게 의미깊은 날이 올 줄 생각하지 못했다”며 “여러분들의 희생을 딛고 한국의 민주화가 진행돼 왔다. 앞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도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 초창기부터 재심 변호인단에 참여했던 심재환은 “재일동포들이 독재정권 때 당했던 참혹한 일들은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얼마나 문제였는지를 보여주지만, 여러분들의 투쟁과 노고가 촛불혁명의 밑거름이 됐다”고 답했다.
보안사 고문 수사관(고병천)의 실형을 이끌어냈던 장경욱은 “재심 변호를 맡으면서 재일동포 정치범들이 겪었던 아픔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재심 무죄가 끝이 아니라 국가 배상과 가해자 처벌 등 피해자들의 완전한 권리찾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전날인 22일 저녁 도쿄 릿쿄대에서 열린 <조국이 버린 사람들> 출판기념회 겸 강연회에는 150여명의 청중이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일본어판 감역자인 이시자카 고이치(릿쿄대 교수)가 대표로 있는 릿쿄대학 평화코뮤니티연구기구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한국 민주화와 재일동포 양심수에 관한 김효순의 강연, 재심 현황에 대한 이령경(릿쿄대 겸임강사)의 강연 등 3시간 가까이 계속됐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던 ‘11·22 사건’ 발생 43주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
지난 22일 일본 도쿄 릿쿄대에서 <조국이 버린 사람들> 일본어판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본의 지성 다나카 히로시(뒷줄 왼쪽 네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
|
재일동포 양심수들에 관한 <조국이 버린 사람들>(저자 김효순)의 일본어판 표지.
|
이석태 변호사의 뚝심
1975년 11월 22일 박정희 정권의 비밀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는 ‘학원침투 북괴간첩단’을 검거했다며 간첩 14명의 명단과 사진을 발표(1차 검거)했다. 이 중 12명이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유학생(오사카에 거주한다던 김삼랑은 가상인물이었음)들이었다. 그해 12월에는 군 보안사가 또다시 재일동포 유학생 6명을 간첩이라며 구속(2차 검거)했다. 11·22 사건으로만 재일동포 유학생 17명이 간첩으로 조작돼 이 중 4명은 사형, 11명은 무기~5년형을 선고받았다. 2명은 4년이 지난 1979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11·22 사건은 일본 사회에 깊은 충격과 상처를 남겼지만, 일본 시민사회와 한국 양심세력의 연대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의 보통시민들이 중심이 된 재일동포 정치범 석방을 위한 구원회의 활발한 활동이 그것이다. 22일 도쿄와 24일 오사카 출판기념회에도 구원회 인사와 일본 지식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22일 도쿄 행사에는 일본의 대표적 지성 다나카 히로시(81·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도 함께 했다. 뒤풀이까지 참석한 그는 “한국은 그동안 많이 변하고 발전했지만 일본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며 “일본 사회가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오사카 행사에 참석했던 이철 구원회의 스미타니 아키라(69)는 “1988년 이철 석방 이후에 모임이 여러번 있었지만 이번 출판기념회에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해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
재일동포 양심수 숫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2007.12)는 일본 관련 간첩사건이 모두 319건(이중 보안사·기무사가 73건을 다룸)이라고 밝혔으며, 진실화해위원회는 ‘재일한국인 정치범 구원 가족 동포회’의 자료를 토대로 일본 출신 재일동포 간첩 사건 피해자는 130여명이라고 추정했다. 독재정권은 청년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가장 약한 고리인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수시로 간첩으로 만들었다. 김효순은 도쿄와 오사카 강연에서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독재권력이 언제든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어항 속의 금붕어였다”고 말했다.
이들 중 현재까지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사람은 모두 33명이다. 이밖에 재심이 진행 중인 사람이 4명, 재판 개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3명이다(이령경 집계). 이들을 모두 합해도 전체 피해자의 30%에 불과하다. 적지 않은 성과이긴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이종수가 2010년 7월 재심을 통해 첫 무죄를 받았지만, 선뜻 재심하겠다고 나서는 재일동포 피해자가 없었다. 고문의 악몽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고통스러운 데다가 자신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 한국의 사법체계와 정치권력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설득해 분위기를 바꾼 이는 오랫동안 인권변론을 해온 이석태(65)였다. 그는 인권에 관심이 높은 심재환, 이상희, 장경욱, 조영선 등과 함께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재심 변호인단을 꾸려 2011년 3월 11일 오사카로 날아갔다. 하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날이어서 가족들이 출국을 말렸지만, 5명의 변호인은 예정대로 3박4일 동안 오사카에서 간첩조작 피해자 20명을 만났다. 진화위 전 조사관 김영진과 당시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김덕진도 동행했다.
“이철과 유영수, 김원중 선생 등은 2011년 3월에 만났을 때 재심을 안 하겠다고 했다. 한국 상황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대한 의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재심을 통한 개별적인 피해 구제에 반대했다. 재일동포 간첩조작은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광주항쟁이나 제주 4·3처럼 특별법을 만들어서 일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경욱은 오사카 변호사회관에서 있었던 양심수들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
재일동포 양심수인 유영수(왼쪽)씨와 강종헌씨가 지난 23일 일본 오사카시 외곽 이시키리 마을의 한 호텔에서 열린 만찬 모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70년대 사형수로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복역중이던 강씨는 1977년 간첩으로 조작돼 들어온 유씨에게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리도록 격려했다.
|
|
1975년 11월22일 중앙정보부가 조작 발표했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대한 당시 신문 보도.
|
재심 겁내는 이 아직 많아
이석태 등은 당시 이에 대해 “법을 만들어서 국가범죄 피해자를 명예회복시키는 게 이상적이나, 한국 정치 지형상 가능성이 낮다. 법 제정 운동을 하다가 실패하면 재일동포들의 좌절감이 더 커질 수 있다. 우선 차선책이라도 시작하자”고 설득했다. 유영수와 이철 등은 재심에 동의했으나, 김원중(지바 상과대 교수)은 훨씬 뒤에야 결심했다. 그는 “바빠서 시간 내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재심은 문제 해결의 정답이 아니라고 봤다. 그런데 김영진 전 조사관이 두차례 더 일본에 와서 ‘재심은 그저 이뤄진 게 아니라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과다. 재심 무죄를 받는 자체가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논리에 설득됐다(웃음)”고 말했다.
그러나, 재일동포 양심수들은 33명 전원 간첩혐의 재심 무죄(일부 항목 유죄 포함)라는 중간 성적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아직도 재심을 두려워하거나 마뜩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데다가 연락이 아예 닿지 않는 피해자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의 사과와 특별법 제정을 통한 일괄 해결을 바라고 있다.
“재심 무죄가 잇따르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아 아직도 우리를 간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회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국가를 대표하는 분이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우리를 청와대로 부르거나 아니면 일본을 방문할 때 잠깐이라도 만나 ‘과거 정부가 여러분께 잘못을 범했다’는 한마디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대통령이 안 해주면 누가 하겠나. 그런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사형수로 13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1988년) 일본으로 돌아온 뒤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한국 민주화 및 재일동포 지위 향상 운동을 하고 있는 이철은 23일 도쿄에서 가진 <한겨레>와의 별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작은 소망이 이뤄질 날을 함께 기다리겠다고 기자도 기꺼이 약속했다.
도쿄/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