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5.29 05:00 수정 : 2018.05.29 16:35

6·13 지방선거 정책 발굴 ‘어젠다 2018’ ① ‘오래된 미래’ 기본소득

알래스카, 자원소득으로 기금
1982년부터 주민들에 배당금
제주도 관광산업으로 부 창출
선거 앞 기본소득 잇단 공약
경기·광주·충남·경북서도 이슈

“제주도 알래스카처럼 충분히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다고 봐요. 난개발을 가져온 국제자유도시 계획을 폐기하고 여기에 투입되는 최대 조 단위의 예산 사업 일부만 줄여도 재원은 충분합니다. 제주를 다시 ‘생명과 평화의 섬’으로 바꾸는 데, 전 도민 기본소득이 중요한 구실을 할 거라 생각해요.”

폭우가 쏟아진 지난 16일,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을 떠난 항공기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하늘에선 많은 여객기가 몇분 간격으로 끊임없이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공항을 빠져나와 만난 고은영(33) 녹색당 제주도지사 후보는 “기본소득의 가능성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고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기본소득’을 대표 공약으로 제시했다. 모든 제주도민한테 해마다 100만원씩 지급하는 내용이다. 제주도민이 66만명(올 1분기 기준)이니, 한 해 66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재원은 기존 예산을 절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주도는 해마다 예산을 10% 이상 남기고 있어요(2016년 예산 집행률 80.4%). 불필요하게 예산만 축내는 국제자유도시 계획을 폐기하고 그 추진체인 제이디시(JDC·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를 해체하면, 기본소득 도입이 가능해요.”

제주공항 앞에서 기본소득 공약 손팻말을 든 고은영 녹색당 제주도지사 후보. 녹색당 제공
기본소득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시민의 ‘적절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현금을 이른다.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 노동이 일상화되면서, 기본소득에 대한 공감대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 아무리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모순된 삶,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일자리가 소멸되는 미래, 복잡한 복지제도를 단순화해 ‘복지의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도 기본소득 논의에 힘을 싣는다.

‘정책’이 사라지다시피 한 6·13 지방선거에서도 일부 후보는 지역민의 삶을 바꿀 정책 공약을 내걸고 선거를 치른다. 국내에서는 아직 논의가 크게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기본소득은 지방정부가 주목할 만한 정책 의제다. 제주는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한 곳이다.

제주의 핵심 산업은 관광이다. 많은 관광객이 제주의 자연을 찾는다. 자연은 제주의 부를 창출하는 공유자산이다. 이는 천연자원으로부터 기본소득을 얻어내는 미국 알래스카를 닮았다.

알래스카주 정부는 1982년부터 주민들에게 ‘영구기금 배당금’을 지급하고 있다. 석유 등 천연자원 수입의 일부를 영구기금으로 적립하고, 이를 각종 금융상품에 투자해 수익을 낸 뒤 이를 주민과 공유한다. 배당금은 알래스카에 1년 이상 거주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다. 연간 약 35만원으로 시작한 배당금은 2015년 230만원까지 늘었다. 월 19만여원꼴이다. 알래스카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빈곤율이 낮으면서 경제적으로 평등한 지역으로 꼽힌다. 알래스카의 기본소득은 이제 어떤 정치인도 ‘침범할 수 없는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제주 성산일출봉. <한겨레> 자료사진

제주 문대림·원희룡 ‘청년수당’ 약속
경기 이재명은 대상 넓힌 ‘청년배당’

‘농민기본소득’ 충남·경북서 이슈로
정의당, 당 차원 주요 공약에 선정

광주선 예술인들 기본소득 요구
“지역 문화계 척박한 현실 개선을”

기본소득 초기단계 긍정적 평가
“선별 넘어 보편수당으로 발전해야”

국내 기본소득 주요 연구자들이 최근 출간한 <기본소득이 온다>를 보면, 알래스카주 정부가 모든 주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근거는 ‘공유자산에 대한 주민의 권리’에서 비롯한다. 그런 측면에서 제주도는 여러 면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관광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지닌 제주의 임금은 전국 최저 수준이다. 높은 고용률을 임시직 위주의 노동자가 떠받치는 구조 탓이다. 게다가 최근 몇년간 부동산 값이 폭등하면서 청년들은 계속 육지로 빠져나간다.

기본소득은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해준다. 재원은 연간 1500만명에 육박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사람당 몇천원 수준의 ‘입도세’를 걷거나, 내국인 면세점, 생수 ‘삼다수’(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가 개발)의 수입 등에서 끌어올 수 있다. 제주도 에너지 보급량의 14%가량을 차지하는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도 제주도가 기본소득 재원으로 활용 가능한 자산이다.

이번 제주도지사 선거에서 기본소득이나 기본소득의 초기 단계라 할 만한 현금성 사회수당 정책을 고민하는 이는 고은영 후보만이 아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문대림(53) 후보와 무소속 원희룡(54) 후보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문대림 후보가 속한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은 2천명의 청년에게 6개월 동안 월 60만원씩 지급하는 ‘청년희망 기본수당’과, 농어업인을 대상으로 한 ‘공익형 소득직불제’ 등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라해문 문대림 캠프 정책실장은 “우리의 청년희망 수당은 서울시의 ‘청년수당’ 모델에 가깝다. 5명씩 500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스스로 경험을 쌓는 과제와 연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농어업인을 대상으로 한 공익형 소득직불제는 기존 직불금제를 기본소득과 유사하게 농민 개인을 대상으로 지급하는 방안이다.

무소속인 원희룡 후보도 19~29살 청년 5천명에게 6개월 동안 월 50만원의 수당을 지급하는 ‘청년수당’을 공약했다. 역시 취업독려수당 성격인 서울시 모델에 가깝다. 원희룡 후보 쪽 정책 담당자인 고경민 전 제주연구원 연구위원은 “6개월간 지원하는 기본소득 성격의 임금과, 취업을 위한 전문화된 교육기관(‘더 큰 내일센터’)을 결합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도지사 후보를 내지 못한 노동당에서는 김연자 도의원 후보가 모든 도민에게 월 10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공약을 제시했다.

전국서 청년·농민·예술인 대상 ‘사회수당’ 공약 떠올라

기본소득 관련 공약은 서울과 경기, 광주, 충남, 경북 등 다른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주로 청년이나 농민, 문화예술인 등 특정 연령대나 계층을 대상으로 한다. 이런 현금성 사회수당 정책은 기본소득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먼저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선 이재명 후보(더불어민주당)는 ‘청년배당’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는 2016년 성남시장을 지내며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살 청년에게 연간 100만원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청년배당 정책을 펼친 바 있다. 이를 경기도 전 지역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23조원에 이르는 경기도 예산의 0.7%가량인 1500억원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이 후보 쪽 주장이다.

광주에선 30여개 문화예술단체로 꾸려진 ‘6·13 지방선거 문화정책연대’가 광주시장 후보를 대상으로 자신들이 발굴한 ‘10대 핵심 문화정책’을 공약에 반영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10대 정책 중 하나로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보장조례 제정’을 소개하면서 “지역 문화계의 척박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경채 정의당 광주시장 후보와 윤민호 민중당 후보가 이를 받아들였다.

정의당은 당 차원에서 월 10만원의 ‘농민기본소득’을 주요 공약으로 내놓았다. 농민소득 안정, 소득 불균형 해소가 목적이다. 김용신 정의당 정책위의장은 “전국의 모든 농민을 대상으로 하면 1조5천억원, (농민기본소득 논의가 한창인) 충남만 따로 추계하면 12만명, 1440억원가량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김 의장은 이 예산 가운데 3분의 1가량은 비료 지원 예산 등 기존 예산을 통합해서, 나머지 3분의 2는 초과세수와 함께 지방소비세율 인상, 부동산 보유세 현실화 등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봤다.

농민기본소득은 대다수 농민이 직불금 등 기존 정부 지원만으로는 최저 수준의 생활마저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한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등이 오래전부터 농민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해왔다. 특히 농민 비율이 높은 충남 등에선 주요 선거 이슈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다. 충남지역 농민단체 등에선 농민기본소득 도입을 요구하고 있고, 양승조 후보(더불어민주당) 등 주요 후보도 그 필요성에 동의한다. 경북도지사 선거에서는 권오을 후보(바른미래당)가 ‘농민기본소득보장제 시행’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지난해 서울시장 시절 청년수당 정책을 시행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더불어민주당)는 이번 공약에 청년수당을 담지 않았다. 정부가 청년 일자리 대책의 하나로 서울시의 청년수당을 전국에 적용하는 ‘청년구직활동수당’을 내년부터 도입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박 후보 쪽 관계자는 “시 차원에서 중앙정부 정책과 연계해 기존 정책을 어떻게 확대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신지예 녹색당 후보가 기본소득 정책을 발표했다. 신 후보는 28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 정책협약식을 하고 ‘서울형 청년기본소득’ 공약을 제시했다. 청년층을 대상으로 월 1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기본소득이나 현금성 사회수당에 대한 관심은 커지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조건 없이 지급하는 ‘보편성’에 대한 오해는 기본소득 논의의 확대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걸림돌이다. 실제 원희룡 후보 쪽도 처음엔 성남시와 같은 ‘모든 청년을 대상으로 한 배당’을 고민하다가 일부 후퇴했다. 원 후보 쪽은 “부잣집 청년에게까지 줄 순 없다는 논란이 있어 지금의 공약으로 정리했다”고 했다. ‘왜 부자한테까지 주느냐’는 식의 반발이 기본소득 논의를 제약한다는 것이다.

성남시의 청년배당 정책을 설계한 강남훈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많은 선진국이 이미 ‘학생수당’ 등 보편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부자를 제외하고, 가난한 이들만 돕는 형태의 복지제도는 적은 예산으로 시작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장기적으로 복지의 증가 속도가 더딜 뿐 아니라, 다가올 4차 산업혁명 경제를 대비하기에 부적합하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기본소득을 국민 모두의 권리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주/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