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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시대와 정황에 따라,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사회·정치적 입장에 따라 매우 상이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페미니즘의 전제와 목적은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왔다.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는 결코 자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층을 지닌 이론이며 운동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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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기획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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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시대와 정황에 따라,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사회·정치적 입장에 따라 매우 상이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페미니즘의 전제와 목적은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왔다.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는 결코 자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층을 지닌 이론이며 운동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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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수년간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의 ‘뜨거운 화두’다.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20~30대 여성 독자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고 있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람도 많다. 도대체 페미니즘이란 무엇이기에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페미니즘과 기독교>, <정의를 위하여>, <용서에 대하여>,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등을 집필한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에게 의견을 청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대중매체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대중매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회자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복수(revenge)의 정치’에 의하여 작동되는 것으로서 남성 혐오적이며 여성우월과 지배를 주장하며, 결과적으로 가정 파괴나 종교 파괴는 물론 궁극적으로 사회분열을 야기한다는 것 등이 페미니즘에 관한 전형적인 ‘왜곡된 신화’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많은 이들은 ‘페미니즘’이란 상식적이고 자명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페미니즘이 ‘자명한 것’이라고 하는 전제부터 괄호 속에 넣는 것이 필요하다. ‘자명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페미니즘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각기 다른 시대와 정황에 따라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사회·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매우 상이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페미니즘의 전제와 목적은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왔다.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는 결코 자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층을 지닌 이론이며 운동인 이유이다.
페미니즘은 명확한 것이 아니다
어떤 양태의 페미니즘이든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여성은 그들의 생물학적 성(sex)에 의하여 구성된 사회문화적 성(gender)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차별받고 배제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근원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전제이다. 그 변화는 제도와 법을 바꾸는 ‘객관적 변화’이기도 하고, 여성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의식과 가치관을 바꾸는 ‘주관적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 지배하는 키워드는
남성중심적 위계·연고주의
페미니즘은 공사 모든 영역에서
근원적 변혁 요구하는 이론
‘불편한 진실’ 환영받긴 어려워
성숙한 민주 사회로 나아가려면
차별 ‘틀’ 깨는 아픔·균열 필요
페미니즘 출발점은 여성이지만
도착점은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
인간적 권리 실현되는 사회여야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이론과 운동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문명사에서 어떻게 ‘지배와 종속’의 메커니즘이 작동되어왔는가에 대한 다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 지배와 종속의 메커니즘은 인간을 우선적으로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집단으로 분리해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교육,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남성의 여성 지배’라는 가부장제적 남성중심주의를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다. 이러한 남성의 여성 지배는 다양한 방식의 ‘지배의 논리’의 틀로써 확장되고 정당화된다. 동시에 ‘우월한 그룹·개인은 열등한 이들을 지배해도 되며, 지배해야 한다’는 지배의 논리는, 식민주의·인종차별주의·계층차별주의 등으로 확장된다.
왜 남성은 물론 여성들조차도 페미니즘을 거부하고 있느냐는 페미니즘의 거부 현상은, 다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개별인들에 대한 적대적 비난보다, 그들이 그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는 근원적인 ‘왜’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페미니즘 논의는 페미니즘 ‘옹호자’와 ‘적대자’라는 ‘편 가르기’식의 파괴적 갈등만 조장하고 서로를 향한 공격적 담론만 생산하게 됨으로써,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사회 분위기를 극대화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페미니즘은 이제까지 많은 이들이 절대적 진리라고 여겼던 것에 ‘근원적 노(NO)’를 제기하는 것이기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점이다. ‘진실’이지만, 그 진실을 대하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불편을 느끼고 거부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래서 페미니즘 논의에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은 ‘우리-그들’ 또는 ‘옹호자-적대자’라는 상충적 대립의 축을 굳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은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하여 각기 지니고 있을 ‘인식론적 사각지대’들을 어떻게 일깨우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과정에서 상이한 이해를 가진 이들이라도, 지속적인 설득과 깨우침을 서로 필요로 하는 ‘동료-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부당한 일에 대한 ‘성찰적 분노’는 필요한 것이지만 상대방에 대한 ‘파괴적 분노’는 양쪽 모두를 비인간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종·계층 차별과 다른 성차별
성차별은 인종차별이나 계층차별과 같은 다른 차별구조와 논리적 유사성을 지닌다. 즉 ‘우월한 쪽’(남성, 주류 인종, 중상류층)이 ‘열등한 쪽’(여성, 비주류 인종, 빈민층)을 지배해야 한다는 ‘지배의 논리’로부터 출발한다. 그럼에도 성차별이 다른 차별과 판이한 점이 있다. 인종차별이나 계층차별은 우선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차별이다. 예를 들어서 사적 영역인 가족관계에서 가족끼리 서로를 향해 빈민층이라고 차별하지는 않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빈민층으로서 갖가지 차별을 받는다. 반면 성차별은 공적 영역은 물론이고 사적 영역인 가족관계 안에서도 행사되는 차별이다. 그래서 성차별은 개별인들의 ‘침실’에서부터 세계 권력의 집중지라고 하는 ‘백악관’까지 존재한다는 말이 등장하기도 한다. 성차별의 범주, 행사 영역과 방식, 그 차별의 주체 등이 다른 종류의 차별보다 더욱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넓게 확산되어 있다는 예시이다. 따라서 이 사회 ‘모든’ 영역에서 근원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이론과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거부는, 어쩌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현상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제까지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에 근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불편한 진실’을 모두가 처음부터 환영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 사회의 사적·공적 공간에서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위계주의·남성중심주의·연고주의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위계주의는 가정, 직장, 교육, 종교, 정치, 경제 등의 영역에서 성별, 나이, 직책 등에 의하여 구성되며 곳곳에서 강력하게 작동된다. 위계 형성의 가장 우선적 범주가 있다면 그것은 ‘성별’이다. 남성중심적 위계주의는 남성을 제1의 성인 ‘주체’로, 여성을 제2의 성인 ‘객체’로 위계를 설정한다. 학연이나 지연이 공적 관계맺기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되는 소위 한국적 연고주의조차 지극히 ‘남성중심적’이다. 즉, 남성중심주의는 한국 사회 도처에서 작동하고 있는 위계주의와 연고주의의 토대가 되는 인식구조이다. 이러한 복합적 위계구조에 대한 저항과 비판이 제기될 때 사람들은 ‘사회적 불안정’을 야기한 것으로 경계한다. 정치적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을 ‘불온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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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17 페미니스트, 직접행동-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 행사.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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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사람들은 ‘현상 유지’를 원한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변화를 모색하고 그 변화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보여준다. 특히 유교문화와 군사문화가 여전히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 사회는, 남성중심적인 위계적 관계 방식을 종종 ‘한국적 미덕’으로 강조하며 재생산해왔다. 남성중심적 위계주의, 연고주의, 그리고 군사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자다움’의 표상이란 ‘여성 지배’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최근 정치, 종교, 예술, 교육 분야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는 ‘미투 운동’이 보여주는 그 성폭력 현상의 광범위성은, 바로 이러한 뿌리 깊은 ‘남성의 여성 지배’라는 남성중심적 위계주의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증이다. 그 위계적 질서를 흔들고자 하는 이들은 가정, 기업, 종교, 더 나아가 국가의 안정, 조화, 평화를 깨는 위험한 ‘불온 세력’으로 쉽사리 적대시된다.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의 이러한 남성중심주의적인 위계적 현상유지의 신화가 지닌 차별성과 불평등성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면서 등장한 이론이며 운동이다. 진실이지만 심히 ‘불편한 진실,’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인 것이다.
파괴가 아닌 ‘변혁적 균열’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모습으로 등장한다. 첫째, 페미니즘은 ‘비판의 언어’와 ‘탈자연화’로부터 시작된다. 페미니즘은 그토록 오랫동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왔던 행위·사유방식·관계방식이 근원적으로 성차별적이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탈자연화’하면서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사적·공적 영역에서 비판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페미니즘은, 도처에서 대부분 남성과 여성에게 각기 다른 ‘불편함’을 준다. 남성들에게는 이제까지 당연하게 누려온 크고 작은, 또는 가시적·불가시적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부장제적 가치를 내면화해온 여성들에게는 이제까지 숙명처럼 알고 익숙해진 ‘안전망’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익숙한 삶의 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상기시키는 페미니즘의 등장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생존의 테크닉’에 익숙하게 살아온 여성들 역시 거부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 되는 것이다.
둘째, 페미니즘은 사적·공적 영역에서 다층적 ‘균열’을 낸다. 페미니즘의 등장은 가정에서의 가족관계와 역할, 직장에서 남성의 보조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던 여성의 역할, 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언제는 소수 남성 지도자들의 보조자 역할을 하던 교회와 같은 종교 공동체에서의 여성의 역할뿐만 아니라, 정치·경제·교육 등 사회 곳곳에서 ‘균열’을 낸다. 그런데 이러한 ‘균열’의 정체는 무엇인가. 페미니즘의 등장이 가져오는 균열은 가정·직장·사회·종교 공동체의 평화, 조화, 그리고 안정을 깨는 ‘파괴적 균열’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평등과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는 진정한 민주 사회의 실현으로 나가기 위한 ‘변혁적 균열’을 내는 것이다. 한 사회가 지닌 차별적 틀이라는 ‘알’을 깨는 아픔과 균열이 있어야, 비로소 그 사회는 좀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새로운 세계로 비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표기를 주저하는 까닭
그렇다면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회는 오직 ‘여성’의 평등성만이 확보되는 사회가 아니다. 페미니즘의 출발점은 물론 ‘여성’이라는 젠더 문제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도착점은 젠더만이 아니라 인종, 계층, 장애, 성적 지향 등 다양한 근거로 차별받고 소외되고 제2등 인간으로 살아가는 주변부인·소수자들이 온전한 인간으로의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이다. 사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그 다층적 평등성과 권리가 제도적으로도 보장되고 확보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면서 인종 차별, 계층 차별, 성소수자 차별, 장애인 차별, 특정 종교 차별 등 다른 종류의 차별에 무관심하거나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페미니즘은 ‘남성-여성’이라는 단순구도에서만 인간을 본다는 지독한 한계를 지니게 된다. 한 인간은 젠더만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중층으로 겹치는 ‘교차성’의 구조 속에 살아간다는 복합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하기까지 하다. 내가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라고 표기하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이다. ‘여성주의’는 페미니즘의 ‘출발 지점’을 예시하는 개념일 수 있지만, ‘도착 지점’의 복합성을 간과하는 ‘여성 중심주의’라고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억압과 차별의 문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젠더’는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계층, 장애, 성적 지향, 인종 등의 문제와 매우 다층적으로 교차한다는 인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현대의 페미니즘은 ‘젠더 렌즈’만이 아니라 끝없이 변하는 정황에 따라서 ‘다중적 렌즈’가 요청되며, 이에 따른 다층적 연대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한 긴급한 과제이다.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급진적 개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페미니즘의 정의는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다. 그런데 나는 이 페미니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확장해야 한다고 본다. “페미니즘은 젠더는 물론 인종, 계층, 장애, 성적 지향 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주장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과 관계 맺기 방식이 평등과 정의에 입각해야 하며, 그들의 권리와 평등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가 민주의식에서 그 성숙성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포괄적 의미의 페미니즘 확산을 위한 운동, 제도개혁, 교육을 다층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치열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사적·공적 영역에서의 페미니즘의 확산 정도가, 바로 한국 사회의 미래가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되는가 아닌가를 판가름하게 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강남순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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