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22 19:06
수정 : 2017.11.23 11:05
【짬】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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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회장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를 지어야 했다. “졸업 때 내가 전교 1등을 해 도지사상을 받았어요. 장학금을 받아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로 되어 있었죠. 그런데 전쟁이 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농사와 중장비 기사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단다. “28살 때 초등학교 담임이었던 정인무 선생을 서울에서 만났는데 3권짜리 ‘마르크스 자본론’ 책을 주시더군요. 이건 자네가 봐야 할 것 같다면서요. 책을 보니 사회·경제·문화가 다 나오더라고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노트에 ‘가치’같이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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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헌(80)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지금껏 독신이다. 그래서 ‘평생 청년’, ‘평생 총각’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를 더 정확히 나타내는 별칭은 아무래도 ‘양심수의 대부’일 듯하다. 1989년 출범한 양심수후원회의 초대 회장은 고 문익환 목사다. 권 회장은 2년 뒤인 1991년 회장을 이어받아 지금껏 지주 노릇을 하고 있다. 85년 설립된 민가협이 양심수 가족 단체라면, 후원회는 양심수 석방 운동과 체계적 후원을 목표로 하는 대중조직 성격의 단체다. 민가협이 93년부터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에서 여는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의 ‘여는 말’도 지난 4~5년 동안 권 회장의 몫이었다.
그는 팔순을 맞아 문집을 내고 지난달 29일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 봄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지난 20일 서울 수유역 근처 자택에서 권 회장을 만났다.
함세웅 신부와 백기완·임헌영·이창복 선생 등 재야·종교계 원로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등 400여명이 참석한 지난 출판기념회에서 특히 눈길을 끈 순서가 있었다. 권 회장이 주도해 2001년 북으로 돌아간 비전향장기수 8명의 최근 육성이 담긴 축하 동영상이 상영된 것이다.
“북쪽에서 (영상을) 보냈죠. 남북교류법 절차를 밟아 통일부에 신고도 했어요. 지금 남북이 꽉 막힌 상황에서 영상이 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정부도 충격을 받았겠지요.” 그는 “2000년 송환자 63분 가운데 현재 22분이 생존해 있다”며 “2차 송환을 희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33분 가운데는 15분이 살아계신다”고 했다.
팔순기념 기념문집·사진집 펴내
30년 이상 비전향장기수 등 돌봄 앞장
“북송 장기수들 축하영상 보내와”
초등 졸업 뒤 독학…논리적 글쓰기
‘절친’ 임헌영 선생 ‘사관 같다’ 상찬
‘평생 총각’ 독신·폐암 말기 투병중
2006년에는 고희 기념 문집 <인권을 다지며 자주 통일의 길로>를 냈다. 60년대 후반부터 절친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고희 문집에 실린 글에서 권 회장을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찌민에 견줬다. ‘체구나 외모, 단순 소박 검소한 생활, 진솔성, 투지와 의지, 보잘것없는 학력(초등학교 졸업) 등의 측면에서 닮은 데가 많다는 것이다. 임 소장은 이번 문집에도 글을 실어 “싸우면서 기록까지 남겨준 권오헌 형이 실로 경이롭다”며 이 문집으로 권 회장은 ‘사관을 겸한 활동가’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밝혔다.
팔순 문집은 평화와 통일을 주제로 한 <자주 없이 통일 없다>와 인권과 국가보안법을 다룬 <양심수도 국가보안법도 없는 세상> 등 문집 2권과 사진집 1권으로 이뤄졌다. 국가폭력과 사상탄압으로 국민의 기본권이 유린되는 장면들을 2002년부터 올해까지 시간 순서대로 보여준다. 간첩 조작이나 통합진보당 해산 등 각각의 사안마다 우리 헌법과 외교 조약, 유엔 헌장 등의 근거를 대며 논리적 접근을 시도한다. 논점은 분명하지만 어조는 차분하다. “내 글은 사회단체 성명이나 학술 논문과는 다릅니다. 법정 공소장과 반박 자료,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씁니다.”
그는 지난 6월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암 세포가 번져 수술이 어렵단다. 하지만 활동을 줄이지 않고 있다. 인터뷰 중에도 그의 핸드폰은 쉴 새가 없었다. “김련희씨가 많이 아파 병원 입원을 의논하는 전화였어요.” 2011년 브로커에게 속아 남한에 온 김씨는 지금 가족이 있는 북으로 가기를 원한다. 김씨는 지난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권 회장에게 직접 자수로 글을 새긴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액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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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출판기념회 때 김련희씨가 직접 자수를 놓아 글귀(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를 새긴 액자를 권 회장에게 선물했다. “특정한 정치신념 때문에 박해받아선 안 된다는 생각을 60년대부터 가져왔어요. 양심수가 한명이라도 남아 있고,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 한 후원회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권오헌) 사진 양심수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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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 출범 때 양심수가 25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30여명입니다. 이석기 전 의원 등 국가보안법 구속자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등 노동운동 관련자들이 대부분입니다.” 1천여명의 후원회원이 월 500만~600만원을 모아 양심수에게 다달이 2만원씩 영치금을 보낸다. 비전향장기수 2명이 생활하고 있는 ‘만남의 집’ 경비도 댄다.
그는 양심수를 “사회공동선을 위해 정치적 신념과 양심에 따라 활동하다 구속된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어떤 체제를 따르는지는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후원회를 만들면서 내가 처음으로 비전향장기수도 양심수에 포함시켰어요. 수십년 옥고를 치르며 정치적 신념을 지켜온 분들이잖아요. 그 뒤로 종교계나 국제사면위 한국지부도 (내 견해를) 받아들였어요.”
그는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3년4개월 옥고를 치렀다. 물고문을 당하다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뒤로 찬 수갑이 끊어지기도 했단다. 3년 전엔 경찰의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나를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범민련 남측본부 비밀회원으로 의심했던 것 같아요. 나는 범민련에 관여한 게 없어요.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지지합니다. 경찰에선 묵비권을 행사했어요. 내 글을 가지고 걸면 내가 100번을 이깁니다.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썼거든요.”
권 회장은 외세를 배격한 자주통일을 주장한다. 60년대 말 이후 일관된 신념이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를 짓다 64년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68년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에 가입해 당원 교육을 담당하는 문화국장까지 지냈다. 이때 강사로 섭외한 천관우·양호민·박현채씨 등과 교분을 쌓았다. 74년 재야인사 71명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할 때 그는 비밀리에 문인들과 천관우씨를 접촉해 참여시켰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었던 정인무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는 지금 남북관계가 ‘7·4 남북공동성명’(1972년) 이전보다 더 나쁜 상태라며 문재인 정부에 당부했다. “촛불정부로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미국 눈치 보지 말고요.”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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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헌 회장이 ‘팔순 문집’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양심수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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