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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11 09:18 수정 : 2017.11.11 11:13

[토요판] 커버스토리
김샘의 ‘유죄’

▶ ‘피고인 김샘(25)’은 유쾌합니다. 그의 변호사도 법정에서 “김샘이 처벌당하면 앞으로 누가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겠냐”고 변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꾸질꾸질하게” 하고 다니지 않습니다. 1심 재판에서 모든 혐의에 유죄가 선고됐고 곧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있는 그가 이렇게 떳떳할 수 있는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대학생 김샘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대사관에 들어간 혐의로 기소됐다. 1심 법정은 그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그의 ‘유죄’는 박근혜 정부가 국민 다수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인 ‘대표적 정책들’에서 기인한다. 박근혜 정부는 김샘의 유죄가 선고되기 두 달 전 국민의 힘으로 파면됐지만, 그를 비롯해 ‘불의한 정부’에 저항한 이들은 여전히 ‘피고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는 16일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그를 만났다. 그는 “언론에 우는 사진만 나가서 다들 울고 다니는 줄 안다”며 웃었다. 그가 웃을 수 있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글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7년 2월9일 오전 11시10분, 9일 오후 5시, 14일 오후 2시10분, 21일 오전 11시20분. 3월14일 오전 11시30분, 21일 오후 2시10분·오후 5시, 28일 오후 5시.

2017년 2월과 3월. 김샘(25)은 한 달에 네 번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나가야 했다. 한 달에 네 번, 법정에서 그는 ‘피고인 김샘’이 됐다.

법정 밖으로 나오면 그는 ‘대학생 김샘’이다. 2011학번이라 학교(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에선 ‘선배 그 이상’이다. 주로 ‘독강’(혼자 강의를 듣는 것)을 한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알 만한 후배들도 모두 졸업을 했”다. “1·2학기 바짝 듣고 졸업을 하려 했”는데 재판 일정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수강 신청 일부를 취소했다. 내년 초 졸업은 물 건너갔다.

김샘은 2014년부터 2년 동안 집회·시위에 참여한 일로 검찰로부터 5건의 기소를 당했다. 그는 2014년 농민대회에 참가하고 2015~2016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반대 시위를 벌인 혐의로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기소됐다. 재판이 하나씩 늘 때마다 한 달에 한 번이던 그의 법정 출석은 지난해 10월부터 한 달에 두 번, 한 달에 네 번으로 늘었다.

지난 5월25일 열린 1심에서 재판부는 김샘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2014년 농민대회 참가 건(형법의 일반교통방해 혐의)을 제외한 사건 4개가 병합된 재판이었다. 형법의 주거(건조물) 침입(아래 상황 ①)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상황 ②~④) 등 그에게 적용된 모든 혐의가 인정됐다. 형량은 벌금 200만원. 8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그의 선처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심 법원은 김샘의 행위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나 국정교과서 국정화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한 범행”이라고 나름의 평가를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법은 어기지 않았냐’는 결론이었다.

항소심 선고를 앞둔 김샘을 11월1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 대현문화공원에서 만났다. 이곳은 2014년 12월24일 ‘평화나비 네트워크’를 비롯한 대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마련한 소녀상을 세운 곳이다. 당시 김샘은 이 과정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항소심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나요?

“1심과 비슷한 벌금형이 나오지 않을까요? 선고유예가 나올 수도 있겠죠. 무죄는 희망사항이긴 한데 안 될 것 같고요.”

―재판받는 거 좀 익숙해졌나 봐요?

“처음 법정 갔을 때, 제 이름 위로 다른 피고인들의 혐의가 쓰여 있는데, 무섭더라고요.(웃음) 변호사님이 가끔씩 얘기했어요. ‘힘들면 그만 가도 된다’고. ‘의무감으로 갈 필요는 없다’고.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거 같아요, 법정이.(웃음)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예요. 대부분 1심에서 벌금형이나 선고유예가 나오면 검찰이 항소하거나 상고하니까 친구들도 법정에 안 가고 싶어도 안 갈 수가 없겠더라고요.”

※이미지를 누르시면 확대됩니다

2015년 12월28일

김샘의 ‘유죄’ 선고는 그보다 앞서 파면(3월10일)된 박근혜 정부에서 싹을 틔웠다. 2015년 12월28일 박근혜 정부와 일본 아베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합의됐음’을 선언했다. 위안부라는 ‘국가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빠진 채였다.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과 한국 시민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그들만의 합의’였다. “굴욕적 합의”(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틀 뒤 1211차 수요집회(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집회)가 열렸다. 참가 대학생들은 집회가 끝난 뒤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막기 위해 ‘지킴이’를 자처했다.

소녀상 지킴이 이틀째인 12월31일, 그를 비롯한 대학생 30명은 일본대사관이 입주한 건물에 들어가 “매국협상 폐기하라” “한일협정 폐기하라”고 외쳤다(①). 김샘은 즉시 투입된 경찰에 체포돼 새해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맞았다. 이틀 뒤인 2016년 1월2일 유치장에서 나와 소녀상 앞으로 온 그는 대학생들이 개최한 ‘일 대사관 기습시위 대학생 폭력연행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굴욕적 한일협상 폐기하라” “역사는 돈으로 지울 수 없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②).

‘한-일 위안부 합의’ 다음날
소녀상 지킴이 농성 돌입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일 대사관 진입했다 경찰 연행

5개 사건으로 ‘쪼개기 기소’
한달 네번 재판에 학점도 포기
“피고인 많다”며 거부하던 재판부
언론 보도 뒤 바로 병합 결정

“기성세대들의 ‘미안함’ 잘 알아
우리가 ‘옳은 일’ 했기 때문에
국정교과서 폐지 등도 가능
재판받는 학생들 신경 써줬으면”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할머니들
“수십년 동안 싸워오신 덕분에
여성·인권·평화…지금의 혜택 누려”
할머니들 더 기다리게 해선 안 돼

―1심 판결문을 봤어요. 집시법으로 기소된 3건에 대해 ‘집회 주최자가 아니다’ 또는 ‘집회는 정당한 행위였다’고 변론했더군요. 정말 주최 안 했어요? 아니면 재판 전략이었어요?

“항소이유서를 가져왔어야 하는데…. 제가 지금 재판중이라 함부로 말하면 안 되거든요?(웃음) 2016년 1월2일 ‘대학생 폭력연행 규탄’ 기자회견의 경우를 보면요. 이틀 전 경찰에 연행됐다가 그날 오전 11시에 풀려났어요. 부모님들과 점심 먹고 농성장에 다시 간 게 오후 1시예요. 기자회견은 2시였어요. 전 한 시간 만에 그걸 준비할 능력이 없어요. 제가 도착했을 땐 이미 피켓들이 다 준비돼 있었고, 기자들도 모이는 중이었어요. 성명서를 읽어달라고 해서 읽었을 뿐이에요. 당일 석방됐다는 경찰 확인서도 재판부에 증거물로 냈는데, 제가 평화나비 대표였으니까 집회를 주최했다고 판단하더라고요.”

검찰의 이른바 ‘쪼개기 기소’로 지난해 11월부터 한 달에도 재판(집시법 위반 혐의 4건을 동일한 재판부에서 별도로 재판)을 여러 번 받았어요. 재판부에 병합 신청을 안 했어요?

“같은 재판부였으니까, 계속 (신청을) 했죠. 안 받아주더라고요. ‘여러 명이 함께 받는 재판인데 병합하면 피고인들이 너무 섞인다’는 이유였어요. 그런데 지난 3월에 ‘한 달에 재판 네 번 받는 대학생’이라는 기사가 나가자 4월에 바로 병합해줬어요.(웃음) 좋았죠. 한 달에 네 번이나 법원에 가니까 정신이 없었거든요.”

11월1일 서울 이화여대 앞 대현문화공원에서 만난 김샘은 “제가 연행되고 기소되고 유죄 선고받은 게 끝이 아니라는 걸 많은 이들이 증명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난 뒤 “안타까운 피해자로만 생각했던 할머니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할머니들을 존경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5년 12월28일부터 많은 일이 있었죠?

“한-일 합의가 터지고 하루 뒤(29일) 정대협 사무실에서 이용수 할머니를 뵐 일이 있었어요. 합의 자체도 화가 나고 억울했지만 농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도 하더라고요. 해본 적도 없고 용기도 안 나는데, 그래도 대표(평화나비 네트워크)니까 당당하게 ‘제가 할게요’라고 해야 하는데. 할머니들을 위해 뭘 하겠다고 단체도 만들었는데 결정적 순간에 움츠러드니까 죄송하고 부끄럽고 미안했어요. 밖에 나가서 펑펑 울고 들어왔는데 할머니가 ‘뭘 그렇게 걱정을 하냐’고 하시는 거예요. 할머니들이 더 힘드실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의연하셨어요. ‘내가 뭐라고 이렇게 무서워하고 힘들어했나’ 싶더라고요.”

―소녀상 지킴이(농성)도 그날 결정한 건가요?

“소녀상을 철거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일(12월30일) 수요시위 끝나고 (소녀상 옆에) 주저앉자고 했죠.”

―농성 둘째 날 일본대사관에 진입했는데, 체포될 각오는 했죠? 반대의견은 없었어요?

“사전에 계획한 건 아니었어요. 농성 첫날 소녀상 앞에서 밤을 새우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고민했어요. 사실 대학생이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국회에서 발언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들이 여기까지 이끌어오셨는데, 국가가 그렇게 해버리니까 손쓸 방법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죠. 농성도 그렇게 시작한 것이고요.”

―대사관에 들어가서 구호 외치고 바로 체포된 거죠?

“대사관에 진입했다고들 하는데, 사실 일본대사관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대사관은 그 건물 8층에 있고 저희는 2층 로비에서 구호 외치다 끌려나왔죠. 게다가 그날은 하필 대사관이 쉬는 날이었어요. 일본은 신정을 쇠는데 12월31일도 휴일이더라고요. 안타까운 건지 다행인 건지.(웃음)”

김샘은 2015년 12월31일 일본대사관이 입주한 건물에 들어가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이틀 뒤인 1월2일 경찰서에서 나온 그는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했고 기다리고 있던 김복동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유치장에서 나왔다는 얘길 들으신 할머니들이 위로하러 오셨다. 잘 안 울었는데 이날은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왜 저에게 실형을 구형할까요?”

2016년 5월31일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2·28 합의 이행을 위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재단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대학생들은 1차 회의가 열린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앞에서 정부의 일방통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샘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는 대학생들의 연대인 ‘평화나비 네트워크’ 대표로 이 기자회견에 참석해 사회를 봤다(③).

박근혜 정부의 ‘불법’과 ‘공작’의 또 다른 사례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그의 ‘유죄’와 관련이 깊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2015년 10월12일 그를 포함한 대학생들은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정부의 국정화 발표에 반대하는 기습 시위를 벌였다(④). 김샘 등은 체포돼 연행됐다.

1심 판결문이 밝힌 김샘의 ‘범죄사실’(①~④)은 그렇게 구성됐다. 2심(항소심) 선고는 오는 16일에 열린다. 검찰은 1심, 2심 모두 그에게 징역 1년6개월을 구형했다. 1심 구형 직후 그는 “2015 한·일 합의가 발표되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책임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소녀상 지킴이 농성을 시작했고 일본 대사관에 항의시위를 가게 됐다”는 탄원서를 써서 재판부에 제출했다.

김샘이 11월1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 대현문화공원에서 인터뷰 중 ‘대학생이 세우는 평화비’에 묻은 먼지를 닦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심 선고 전에 직접 탄원서를 써서 보도가 많이 됐죠?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도 탄원서를 써주셨어요. 학교(숙명여대) 커뮤니티에서도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는 얘기가 나왔어요. 반면 ‘어찌 됐든 죄는 지은 거 아니냐? 왜 무죄라고 하느냐?”는 댓글도 있었어요.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탄원서가 공개되고 보도돼서 깜짝 놀랐죠. 온라인으로만 8만명 이상이 탄원서에 서명했어요. 그거 출력·정리해서 첨부하느라 한참 걸렸어요.”

―김샘씨 포함해서 재판 중인 학생들의 금전적 어려움은 없어요? 변호사 수임료도 필요할 텐데.

“1심 수임료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만든 재단에서 도와주셨어요. 변호사 수임료가 높진 않은데 20~30명이나 되니까 생각보다 꽤 들더군요. 다행히 2심부터는 <미디어몽구>를 통해 후원금이 들어와서 다른 친구들 변론비까지 댈 수 있게 됐어요.”

―집시법의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할 생각은 안 했어요?

“그건 안 했고, 대신 법리적으로 반박을 치밀하게 했죠. 건조물 침입은 ‘그 건물 자체가 누구나 출입이 가능한 공간’이라는 얘기도 했고요. 집시법도 이번에 좋은 판례를 남겨 보자는 각오였어요. 경찰이나 검찰은 기자회견문 읽은 것도 그냥 미신고 집회로 엮어버리잖아요. 집회를 신고하는 이유는 집회와 시위를 보장하기 위함인데 이게 악용되고 있잖아요. 미신고자를 처벌하는 쪽으로만.”

―항소심에서 ‘희망적’인 분위기가 감지된 건 없어요?

“항소심 판사님은 아무 질문도 안 하던데요.”

―경찰이나 검찰에 ‘찍혔다’는 생각도 해봤죠?

“역사박물관 앞 기자회견엔 다른 학생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저만 콕 찍어서 기소했어요. 아, 다른 친구들도 기소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1심에서도 검찰이 저한테 실형을 구형할 거라곤 예상 못 했어요. ‘뭐 잡혀가기야 할까’ 하면서도 좀 무서운 거예요.”

―항소심에서도 검찰은 같은 형량을 구형했는데요.

“1심 구형 때 놀랐는데 항소심에서도 그러니까, ‘정말 날 실형을 살리고 싶은 건가’ 싶더라고요. 검찰이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국정을 뿌리째 흔들었다”며 징역 2년6개월을 구형했잖아요. 저와 1년 차이밖에 안 나요. ‘난 무엇을 뿌리째 흔들었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웃음)”

―검찰 조사는 몇 번 받았어요?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변호사랑 같이?

“변호사 선임을 초반엔 못 했거든요. 한 번은 혼자 갔어요.”

―쉽지 않죠? 혼자 조사받는 거.

“분위기 싸하더군요. 검사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더라고요. 조사는 수사관이 했고 끝나고 가려는데 검사가 와보래요. 검사 앞에 갔더니 ‘왜 묵비를 하냐’고 물어요. 전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진술했다가 불리하게 작용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묵비는 인정된 권리 아니냐. 그래서 그렇다’고 했죠. 그러니까 대학생 정도 됐으면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나요. 그러지 않고 왜 묵비를 하냐고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팔을 꼬고 묵비를 하냐’고. ‘떳떳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뭐랬어요? 그래서?

“별 얘기 안 했어요. 제 태도가 맘에 안 든다는 소리잖아요. ‘가도 되냐’고 했더니, 또 뭐라고 한참 잔소리를 하다가 가라고 하더군요.”

―경찰에서도 묵비했죠?

“예. 종로경찰서에서도 묵비했는데, 할 때마다 한소리씩 하더군요. 마찬가지였어요. 묵비권은 피의자 권리인데, 그런 식으로 물으면 사람들이 위축돼 묵비를 할 수 있겠어요?”

지난 8월1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 타종행사에 김복동 할머니와 함께 참가한 김샘. 한복을 입고 신이 나 있다. 김샘 제공

정부가 바뀌었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폐지됐다. 검찰은 교육부가 국정화 여론을 조작한 의혹을 잡고 그 ‘윗선’을 찾는 수사를 벌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졸속 합의한 2015년 12월28일 한·일 협정의 문제점을 검토하는 태스크포스도 출범했다. 무엇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한-일 협정을 추진했던 박근혜 정부를 촛불이 탄핵했다. 그렇지만 ‘피고인 김샘’은 여전히 재판중이다.

―피고인으로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억울하지 않나요?

“국정교과서 폐지됐을 때 정말 기분 좋았어요. 이순신 동상에 올라갔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아래 있는 거북선 동상에 올라간 거예요.(웃음) 제 행동이 결정적인 건 아니었겠지만, 대학생들의 노력, 교수님들의 시국선언, 이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의 결과를 얻은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들끼린 ‘우리가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죠. 아쉬운 건, 여전히 저를 비롯한 친구들이 국정교과서나 한-일 합의 관련된 재판을 받고 있잖아요. 이전 정권이 잘못한 일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저희 같은 학생들도 함께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어요. 바쁘시겠지만.”

―행동으로 나서지 않은 기성세대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없어요?

“저희 엄마도 그러셨지만 다들 많이 미안해하셨어요. 법정에서 변론할 때도 변호사님이 그런 말씀 하셨어요. ‘기성세대가 해결했어야 할 문제인데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그런 탄원서도 많았어요. 그래서 ‘김샘이 처벌당하면 누가 이후에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겠냐’고 했어요.”

―‘재판 이후 나를 공격하는 수많은 것들이 무서웠다’는 말을 했던데, 누가 어떤 공격을 했어요?

“재판이 시작될 땐 지금 정부가 아니었잖아요.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죠.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몰랐으니까요. 당당한 일을 했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피고인이란 단어가 앞에 붙으니까 마음속으론 무서웠어요. 시선들도.”

김샘의 사연을 들은 일본 일용직노동조합 활동가가 지난 7월5일 김씨를 만나 재판 비용으로 쓰라며 후원금을 전달했다. 김샘 제공

초등생이 “안 좋은 법은 고쳐야”

대학생이 되기 전 김샘은 경기도 가평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2008년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열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골”이라고 했다.

―남들 다 하는 촛불집회도 모르고, 뭘 하며 지냈어요?

“그저 그런 좀 멍충한…(웃음)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었죠. 열심히 놀고 시험 공부하고. 경기도 가평이 무슨 시골이냐고 하는데, 가평 중에서도 설악면이 시골이에요. 한 학년에 두 반밖에 없었어요.”

―서울 왔으니 출세한 거네요?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이 귀촌하셔서 초등학생 때부터 가평에서 살았죠. 집안 사정이 있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시골에서 키워야 한다는 ‘교육철학’ 같은 게 있으셨어요.”

―평화나비 활동을 지지하셨을 것 같네요, 부모님이.

“크게 반대는 안 하셨죠. 처음엔 ‘니가 얼마나 오래 하겠어’ 정도셨겠죠. 그러다 농성도 하고 연행되니까 좀 걱정하셨는데, 지금은 다 이해해주세요.”

―크게 간섭하시진 않는 거군요?

“특히 엄마가 쿨하시죠. 서울 와서 1학년 이후론 계속 하숙을 했는데, 엄마는 하숙집에도 한 번 안 오셨어요. 절 보러 서울에 처음 오신 게 일본대사관에서 연행돼 경찰서에 있을 때 면회 오신 거예요. 깜짝 놀랐죠. 내색을 잘 하시지 않는데 그날은 마음 아파하시더라고요. 근데 울진 않으셨어요, 그날은.”

―언제 우셨어요?

“유치장 나온 뒤 소녀상 앞에서 농성을 계속했는데, 어느날 엄마가 친구들과 같이 먹으라고 죽을 쒀 오셨어요. 그때 우셨어요. 미안하다고. 어른들이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인데 엄마 세대가 못 해서 미안하다고. 정말 깜짝 놀랐죠.(웃음) 유치장에서도 안 우셨는데.”

―유치장에 갇힌 딸보다 함께 농성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우셨군요? 엄마와 딸의 ‘코드’가 좀 비슷한 거 같네요.

“지금까지 제 가치관이 형성되는 데 엄마의 영향이 컸을 거예요. 할 말 있으면 꼭 하는 성격이 닮았죠. 엄마가 그런 말을 많이 하셨어요. ‘여자라는 것에 갇히지 말고 싫으면 싫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라’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목격한 모든 사람이 행동으로 나서진 않잖아요. 심지어 법을 어기면서까지.

“재판 중이에요. 법을 어겼는지는 아직 모르죠.(웃음) 법 얘기 나오니까 생각났는데, 초등학교 때 법의 날 글짓기를 했는데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글을 써야 하는데 ‘안 좋은 법은 고쳐야 한다’는 취지로 썼던 기억이 나네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집안 분위기가 그렇군요?

“저희 집안은 소통과 토론을 중시하는 집안이에요. 엄마의 독재가 조금 있긴 하지만.(웃음) 아빠는 주로 참으라고 하시죠.”

―대학교 2학년 때 수요시위를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요? 그러고 나서 4학년이던 2014년에 평화나비를 시작하면서 휴학을 했어요.

“드라마틱한 이유가 없어서 아쉬운데…(웃음) 마음에 남았던 것 같아요.”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부의 ‘한-일 위안부 협상’이 발표된 다음날인 2015년 12월29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김샘은 이날 “결정적 순간에 움츠러드니까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펑펑 울었다. 오히려 할머니들이 “뭘 그렇게 걱정을 하냐”며 그를 다독였다고 한다. 김샘 제공

김샘은 2012년 8월14일 “한 살 어린 후배에 이끌려” 수요시위에 처음 갔다. 2012년 ‘이화나비 콘서트’를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대학생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서울 지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평화나비 콘서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2014년 5월 친구들과 함께 ‘평화나비 네트워크’를 꾸렸다.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여성·평화·인권 문제 등을 토론하고 공부하는 동아리였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기 전후로 달라진 게 있어요?

“처음 시작할 때 다들 그런 마음으로 오는데, 할머니들을 안타까운 피해자로 생각해요.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들 만나면 우는 친구들이 많죠. 내가 무엇이든 해주려고 오는데 돌이켜보면 제가 많이 받았어요. 할머니들이 수십년 동안 싸워오신 덕분에 인권문제, 여성문제, 평화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고, 그 혜택을 저를 포함한 우리 세대들이 누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힘든 이야기를, 그것도 성폭행 피해자들이 피해 당시 또래의 아이들에게 전하는 게 수요시위잖아요. 사죄를 받는 문제를 넘어 우리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게 있으니까 그러시는 거예요.”

―깨달음을 얻은 거군요?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사람을 생각하는 걸 배웠다고 할까요. 일본이 잘못했다를 넘어서 할머니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를 보게 된 거죠. 노사 문제를 예로 든다면 회사 문제, 노조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하는 식으로요. 사람들의 삶을 고민하는 걸 배운 게 가장 큰 깨달음이죠.”

“시간이 없어요”

―문재인 정부가 한-일 합의를 뒤집거나 폐기할 거라는 기대가 크겠네요?

“그렇죠.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외교라는 게 우리 정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걱정도 되겠어요?

“윤미향 정대협 대표님이 오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린 글에서) 그러셨어요. ‘더 이상의 기다림은 폭력’이라고. 할머니들 연세가 많아요. 할머니들이 안 계신다고 운동을 멈추진 않겠지만 살아 계실 때 해야 해요. 새 정부에서 관심을 많이 보였잖아요.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아베 총리에게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도 했고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줄 정부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많은 촛불이 타올랐다고 생각해요.”

―한-일 합의 무효화 이후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할머니들이 원하는 7가지는 변한 적이 없어요. 전쟁범죄 인정, 진상 규명, 공식사과, 법적 배상, 전범자 처벌, 역사 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그걸 일본 정부에 요구해야죠. 피해자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외치고 연구자들이 자료를 모으고 있을 뿐, 국가가 한번이라도 제대로 나서서 요구한 적이 있나 묻고 싶어요.”

―김샘씨는 이후에 무얼 할 거예요?

“졸업한 뒤에요? 고민이 좀 늦긴 했는데, 몸으로 때우는 게 아니라(웃음) 좀더 전문성을 길러야 할 것 같아요. 여성학이나 국제 분쟁 같은 것들을 공부해 보고 싶어요. 부모님께 힘들게 대학원 얘길 꺼냈는데 흔쾌히 지지해주셨어요. 대신 얼른 졸업하고 빨리 좀 가라고.(웃음)”

―알아보는 사람들 있어요?

“길에서요? 별로 없어요. 촛불집회 가면 가끔 알아보시는 분들은 있었어요. ‘어 김샘씨, 기사 봤다’고. 아, 1심 선고 기사 나간 뒤 고등학생들이 그 기사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됐다며 연락 온 적도 있었어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알리기 위해서 친구들과 배지를 판매해 수익금을 할머니들한테 기부했대요. 제가 그냥 경찰에 연행되고 끝난 게 아니라는 걸 그들이 증명해줬어요.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그렇게 증명받았다고 생각해요.”

11월1일 김샘을 만나기 직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한 분(인적사항·장례절차 미공개)이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34명으로 줄었다. 할머니들에게도, 그 할머니들 곁을 지킬 김샘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할머니들을 만나며 얻었던 ‘깨달음’을 후배 청소년들이 얻을 수 있는 시간도.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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