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선, 엄마의 목소리… 그 마음만으로 족하다면 언제라도 나설 수 있습니다.” 지난달 11일 서울시청 앞 광장의 퀴어문화축제에서 있었던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프리허그 동영상 주인공 ‘뽀미’씨는 조심스레 인터뷰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낸 지 한 시간도 안 돼 흔쾌히 응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괜찮아요! 오세요.”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청년들에게, 엄마뻘 되는 아줌마 서넛이 활짝 웃으며 손짓을 한다. 쭈뼛거리면서 다가서는 젊은이들을 넓게 팔 벌려 꼭 안아준다. 그저 한번 껴안아줬을 뿐인데, 젊은이들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어깨를 들썩이고 운다. 엄마들도 같이 운다. 두 볼을 쓰다듬어 눈물을 닦아주고 양쪽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몇 번이고 주문처럼 외쳐준다. “최고예요. 파이팅!” ‘프리허그(Free Hug), 성소수자 부모모임’이라고 쓰인 작은 손팻말 하나를 들고 선 엄마들의 따뜻한 포옹은 백 마디 말보다 진하고 뜨거웠다.
지난달 11일, 서울시청 앞 광장의 퀴어(Queer, 성소수자)문화축제에서 있었던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프리허그 동영상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국내 조회수 50만건을 넘기며 온라인상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1분25초의 짧은 동영상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눈물 흘리며 공감했다. 이 동영상에 등장하는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쉽사리 인터뷰에 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면에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는 건, 엄마에게도 커밍아웃을 하는 것만큼의 용기가 필요할 터였다. 전해 받은 그의 이메일 주소로 인터뷰의 취지를 설명하며 협조를 청하는 편지를 썼다. 한 시간도 안 돼서 그가 응답했다.
“엄마의 시선, 엄마의 목소리… 그 마음만으로 족하다면 언제라도 나설 수 있습니다.”
‘뽀미’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엄마, 이은재(50)씨였다. 큰딸이 레즈비언이라고 했다. 엄마로서 자식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가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성소수자의 엄마로 자신을 드러내기까지 어떤 고민과 갈등을 겪었을까? 우리 사회 성소수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평범한 엄마로서 아이들을 지켜보며 간절히 전하고 싶은 얘기를 듣고 싶었다.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에 있는 성소수자 부모모임 사무실로 찾아갔다. 건물 현관에도, 사무실 입구에도, 간판은 달려 있지 않았다. 행여 건물주가 꺼릴까봐 이때껏 간판 없이 사무실을 써왔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했던 비타음료
성소수자 부모모임(이하 ‘부모모임’)은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약칭 ‘행성인’)의 회의실을 빌려 쓰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가엔 성소수자 실태와 제도, 인권문제에 대한 자료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한쪽 구석엔 예쁜 문방구처럼 갖가지 브로슈어와 알록달록한 스티커, 배지, 무지개색 갈기를 가진 작은 마스코트 인형들이 아기자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부모모임’이나 ‘행성인’에서 외부 행사에 나갈 때 홍보용으로 가지고 가는 물품들인 듯했다.
-뭐라고 부르는 게 편하세요?
“여기선 서로 닉네임으로 불러요. 뽀미가 원래 포미(for me)라는 뜻이에요.(웃음)”
-그럼, 저도 뽀미님으로 부를게요. 이번에 프리허그 동영상으로 ‘페북 스타’가 되셨어요.(웃음) 행사 이후에 알아보는 사람 없던가요?
“없던데요.(웃음) 페북 스타니 뭐니 하는 얘긴 들었는데, 실제로 별 차이는 못 느껴요. 근데, 얼마 전에 미국 올랜도의 성소수자 클럽 총격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서울-올랜도 연대 촛불문화제’가 있었어요. 거기 추모사를 하러 갔는데, 어떤 고등학교 남학생이 교복을 입은 채 저를 찾아왔어요. 뭐를 하나 내주더라고요. 얼떨결에 받았어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건네준 게, 비타500 한 병이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먹어본 비타500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거였죠. 그래서 남한테 나눠주지 않고 혼자서 꿀꺽꿀꺽 다 먹었어요.(웃음)”
-동영상을 보고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군요. 영어자막이 달린 해외용 동영상은 조회수가 475만건가량 되던데요.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어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이슈가 됐다는 게 엄마 입장에선 오히려 씁쓸하죠. 이 아이들을 얼마나 안아주지 못했으면 이게 이슈가 될까, 너도나도 안아주었다면 이슈가 될 것도 없는데.”
-저도 동영상 보면서 울컥했습니다. ‘저렇게 안아주고 등 두들겨주는 사람이 여태 없었구나’ 싶어서.
“처음엔 ‘날도 더운데 와줄까?’ 걱정했지요. 프리허그를 시작할 땐, 계속 소리쳐서 사람들을 불렀어요. ‘오세요. 엄마 마음으로 안아드릴게요.’ 그렇게 불러도 이 친구들이 선뜻 다가오지를 못해요. 대개가 내성적이고 자기표현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몇 걸음 오는 데도 용기가 필요해요. 나한테 다가오면서 벌써 울먹울먹하고 와락 안기면서 눈물을 쏟아내고… 자료집 파는 것보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게 정말 힘이 되는 거구나 깨달았죠.”
-자기 엄마를 생각하면서 울었겠지요.
“그랬을 거예요. ‘저희 엄마도 이곳에 와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얘기한 친구가 여럿 있었어요.”
퀴어문화축제 프리허그 동영상 국내 조회수 50만건 넘기며 화제 올랜도연대 행사서 만난 한 남학생 “어머니, 감사합니다”며 음료 건네 아이들 얼마나 안아주지 못했으면…바꿀 수 있다면 왜 안 바꾸겠나?
-퀴어퍼레이드가 열리는 동안 맞은편 대한문 앞에선 성소수자 혐오세력이 격렬한 반대집회를 했어요. ‘동성애는 인권도 아니다’ ‘동성애 합법화하는 차별금지법 반대’ 같은 손팻말을 들고 “퀴어축제는 음란행사”라면서 목청을 높였지요. 그래도 직접충돌을 피하면서 용케 퍼레이드를 마쳤어요. 무슨 행동수칙 같은 게 있었나요?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었지요. 그들이 혐오발언이나 공격적 행동을 해도 ‘사랑해! 사랑해!’ 이런 구호로 대응했어요.”
-서울에서 퀴어퍼레이드를 한 바로 다음날, 미국 올랜도에서는 성소수자 혐오자에 의한 총기난사사건으로 50명이 사망했어요.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혐오세력이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진 않았나요?
“제가 지금 목이 쉬었는데, (6월)26일날 대구에서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에 다녀왔거든요. 거긴 서울과 달리, 바로 1미터 앞에서 혐오세력들이 확성기를 들고 소리를 질러요. 그 소리 듣지 않으려고 우리도 큰 소리로 ‘차별은 나빠요’ ‘혐오를 멈춰요’ 외치면서 걸었어요. 작년엔 대구 행사에서 인분투척사건도 있었대요. 다행히 올해엔 큰 불상사 없이 끝났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서울에서 열린 이번 퀴어퍼레이드에 성소수자뿐 아니라, 가족 단위로 참석한 일반시민도 많았다고 들었어요.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세계 3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로도,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가장 급격히 증가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하고요. 그런데 한편으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세력도 막강해졌어요. 지난 총선에서 동성애 반대를 기치로 내건 기독자유당이 2.6%를 얻어서 비례대표 의석 확보에 근접하는 득표를 하기도 했고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고 느껴요. 이 친구들이 미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데, 거기 나오는 성소수자가 특별히 나쁜 이미지로 그려지기보다는 ‘같이 사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반면에 보수 기독교 세력들은 최근에 ‘치유센터’를 크게 건립해서 ‘전환치료’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퍼뜨리고 있지요.”
-전환치료가 뭐예요?
“성소수자를 치료하면 일반인처럼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상담치료나 약물요법으로 실제로 효과를 거둘 수 있나요?
“만약 그렇게 해서 바뀔 수 있다면 우리 친구들(성소수자들)은 다 바꾸려고 했을 거예요. 얼마나 많은 혐오와 편견에 손가락질 받고 있는데, 자기가 바뀔 수 있으면 왜 안 바꾸겠어요? 게이 친구들 사이에 유행어가 하나 있는데, ‘일틱하다’는 말이 있어요.”
-일틱? 무슨 뜻이에요?
“‘일반인틱하다’ ‘일반인스럽다’는 뜻이에요. 어떤 모임에 갔는데, 누가 일틱하다고 하면 그 친구는 굉장히 킹카인 거예요.”
-일반인 같은 친구가 인기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자기들도 바뀌고 싶은데 안 되는 거예요. ‘게이하다’는 말도 있어요. 손짓, 몸짓, 발짓, 그런 게 ‘게이스럽다’는 거죠. 그걸 누가 가르쳐줘서 아나요? 무슨 학교가 있어서 가르쳐주는 거 아니거든요. 상담받고 치료받아서 바꿀 수 있는 거면 동성애자 아무도 없을 거예요. 의학적으로도 이게 질병으로 치료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밝혀져서, 미국에선 1973년에 정신질환 분류목록에서 삭제되었고요. 세계보건기구에서도 1990년에 동성애를 질병부문에서 뺐어요.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을 억지로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실제 효과가 없었다는 게 이미 국제적으로 증명되었다고요.”
-실제로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은 타고나는 거란 말씀이세요?
“네. 2011년에 미국에서 조사된 거로는 100명 중 3.5명이 성소수자래요. 30명 한 반에 한 명꼴로 있다는 얘기죠. 몰라서 그렇지 주위에 많을 거예요. 연구 결과로는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처음 깨닫는 건 4살 무렵이고, 성적 지향을 처음 자각하는 평균나이는 13살이래요.”
-굉장히 이른 시기네요.
“네. 그런데 그 이후에 아이들이 그런 자기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길게 걸려요. 이게 진짜인가?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는 거고. 자기들도 엄청 혼란스러울 거 아니에요? 나는 저주받은 건가? 나는 살아가도 되는 존재인가?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부모한테 커밍아웃을 하는데, 자기를 낳아준 부모조차도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깊이 절망하고 좌절해요. 우리나라 청소년 성소수자의 77.4%가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하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해봤다’는 응답자도 47.4%래요.”
뽀미씨는 다니던 직장에서 1년 전에 부당한 해고를 당한 뒤 집으로 돌아오며 지하철을 탔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다른 세계에 있고, 나만 동떨어져서 혼자만의 세계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이 왈칵 몰려왔다고 했다. 그날 저녁 뽀미씨는 딸에게 ‘너는 온통 세상과 싸우고 있는데, 엄마는 그걸 오늘에야 이해했구나.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엄마, 나는 여자가 좋아”
그도 처음부터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집안 내력에 성소수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부부간에 특별히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친정아버지는 엄격하고 고지식한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버지의 권유로 그도 서울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만난 남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고 아이를 낳고서 상담심리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착실하고 진중한 남편은 현직 교사로 재직 중이다. 두 딸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던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닥친 건 큰딸이 고1 되던 해였다.
-처음 딸이 성소수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 아이가 17살일 때인데, 펑펑 운 얼굴로 자기 침대에 엎어져 있는 거예요. 그런데 책상 위에 편지가 있길래 슬쩍 봤더니 연애편지더라고요. ‘고등학생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연애감정에 휩싸여 있냐?’고 야단을 쳤죠. 그랬더니 딸이 ‘그거 ○○(여자친구)한테 보내는 거란 말이야!’ 하더라고요. 그러고 며칠 후에 그 친구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요. 당신 딸이 우리 딸을 좋아한다고 학교에 소문이 났으니, 당신 딸을 빨리 전학시키라고. 그래서 딸한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엄마, 나는 여자가 좋아.’”
-근데 그 또래 여학생들 간에는 그런 미묘한 감정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 무렵엔 서로 연인처럼 좋아하기도 하고, 누가 끼어들면 질투하기도 하고.
“나도 그래서 ‘네가 성인이 돼서 다시 얘기해보자’ 그랬어요. 그러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지켜본 거예요.”
-남편한테도 알렸나요?
“제가 얘기 듣고 2주 후에 ‘자기야, 당신 딸이 여자가 좋다던데’ 하고 일부러 가볍게 얘기를 던졌죠. 남편도 ‘다시 돌아오겠지’ 하곤 서로 별다른 얘길 안 했어요. 서로 표현을 안 하고 딸을 조용히 관찰했던 것 같아요.”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부모 모두 고민이 깊으셨겠어요.
“그 말이 잊히지가 않아요. ‘엄마, 나는 여자가 좋아’라고 했던 그 문장이 (팔을 쓰다듬으며) 피부에 딱 붙어서 떼어지지 않는 거 같았어요. 밥 먹을 때나, 거울 볼 때나, 잠자려고 누울 때나, 그 소리가 안 없어져요. 나중에 ‘그렇구나. 괜찮아. 너는 충분히 아름다운 존재고 살만한 가치가 있어’라고 인정하고 그 소리가 충분히 내 몸 안으로 스며들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피부에 붙어 있던 그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아요.”
-‘이게 변할 수 없겠구나’ 인정한 건 언제예요?
“대학에 가면 ‘엄마, 내가 착각했나봐. 진짜로 멋진 남자를 만났어’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을까, 항상 상상했죠. 대학 가서 딸애가 실제로 남자친구를 사귄 적도 있고요. 그래서 ‘너, 남자친구도 있었잖니?’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딸이 ‘응, 사귀어 봤어. 나도 진짜 내가 어떤 건지 시험을 해봤어. 근데 엄마, 가슴이 떨리지를 않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남자친구한테 오히려 죄책감이 들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구나 생각했죠.”
-그 뒤로는 진심으로 딸을 인정하고 수용하셨나요?
“그게 또 아닌 것이, 17살 때 처음 얘길 듣고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6년이 걸린 것 같아요. 나도 소위 똑똑하고 잘난 체하는 엄마였거든요. 딸이 레즈비언이란 걸 알고도 ‘네가 동성애자고 안 바뀐다고 하면 엄마는 터치하지 않을게. 하지만 동참하진 않을 거야’ 했거든요.”
-그게 무슨 뜻이죠?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난 모른 척하겠다’ 그건가요?
“그렇죠. 나중에 들었는데 제 딸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엄마를 잃었다’는 생각에 ‘죽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6년 만에 달라진 계기가 뭐죠?
“제가 다니던 직장에서 1년 전에 부당한 해고를 당했어요. 나는 정당하고 옳은 일을 했다고 믿는데 아무도 내 얘기를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배척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지하철을 탔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다른 세계에 있고, 나만 동떨어져서 혼자만의 세계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이 왈칵 몰려왔어요. ‘아, 이 괴리감이 우리 딸이 끊임없이 내게 말하던 그것이구나’ 싶었지요. 내 딸이 늘 이런 느낌으로 살아왔구나…. 딸한테 ‘누가 너의 섹스라이프를 궁금해하겠어? 연애하는 것만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될 거 아냐?’ 했었는데, 그게 얼마나 가슴 아픈 폭언이었는지 새삼 느꼈어요. 누구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근원적인 에너지가 되고, 그게 사회적으로 자신의 가치와 자존감을 세우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난 그걸 분리시키라고 한 거예요. 딸한테 진심으로 사과했어요. ‘너는 온통 세상과 싸우고 있는데, 엄마는 그걸 오늘에야 이해했구나. 미안하다’ 하니까, 눈만 껌벅껌벅하며 듣던 딸이 눈물을 쏟더라고요. 둘이 손잡고 펑펑 울었어요.”
보수기독단체 ‘전환치료’ 주장하나 의학적으로 치료될 수 없다 밝혀져 미국, 정신질환 분류목록에서 제외 세계보건기구도 질병분류에서 빼
성소수자 부모모임 활동가 뽀미씨가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마포에 있는 성소수자 부모모임 사무실에서 이진순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행복해야 해! 인내심 있게
-이번에 프리허그 영상으로 얼굴이 알려지신 것도 그렇고 지금 제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것도 그렇고, 엄마로서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성소수자 부모로 자신을 드러내기까지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요?
“(허공을 응시하며 한참 생각하다가) 체면? 음… 체면 때문인 것 같아요.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스스로 밝히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가족이나 친척, 친구한테도 사실대로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결국은 체면 때문인 거죠. ‘뭐, 자랑거리는 아니지 않나?’ 하면서 창피해하니까.”
-근데 뽀미님은 어떻게 그걸 극복하셨죠?
“여기 부모모임에 나오면 매번 쭉 둘러앉아서 자기소개부터 해요. ‘저는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 뽀미입니다’ 이렇게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라는 자기소개를 계속하는 거죠. 내 입으로 말하고, 내 목소리를 계속 듣는 거죠. 사실 처음에는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조차 힘들어요. 낯설고 원치 않는 이름이니까. 그런데 자꾸 하다 보니까 자연스러워져요. ‘나 레즈비언 딸 뒀어. 그게 뭐?’ 하는 생각이 들죠. 나는 레즈비언 엄마, 누구는 트랜스젠더 엄마, 여기 온 아이들도 ‘나는 여성 동성애자입니다’ ‘남성 동성애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얼굴을 감출 이유도 없는 거죠. 내가 특별히 무슨 인권운동가여서 거리낌이 없는 게 아니에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닥쳐보면 알아요.”
-동성애자 부모라고 하면 여전히 불편한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계시죠?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아 그래?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라고 받아들이는데, 한자어 ‘동성애자’라고 하면, ‘성애자’에 방점이 찍혀버려요. ‘아동성애자’라고 할 때처럼 성행위를 먼저 떠올리죠.”
-변태라고요?
“예.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 우리가 ‘이성애자’라고 하진 않잖아요. 동성애자라는 단어는 ‘더럽다, 변태자들, 건전하지 않은, 건강하지 않은 존재. 바이러스 같은 존재’ 이런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어요. 이게 혐오의 시작이죠. 그런데 우리가 정작 던져야 하는 질문은 다른 거예요.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와 함께 살고 싶은가?’ 저라면, 날 이해해주고, 위로해주고, 서로 대화하고, 서로 웃으면서 밥 먹고, 손잡고, 안아주고, 같이 잠들고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을 거예요. 그 대상이 성이 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 누가 비난을 하겠어요.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을 변태로 낙인찍는 사람들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을까요?”
-자식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내 탓이 아닐까 자책을 하는 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그런 마음 때문에 자식이 성소수자라는 걸 부모로서 더 인정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어요.
“부모 탓이 아닙니다. 이게 유전자나 환경 탓이라면, 같은 환경에서 나고 자란 형제가 판이하게 다른 게 설명이 안 돼요. 저도 딸 둘을 낳았지만, 실제로 아들 하나 딸 하나 키운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큰애는 블록이나 농구공 좋아하고, 게임하고 스케이트하고 바퀴 달린 것 좋아하고, 작은애는 화장품세트, 분홍색 좋아하고 치마 좋아하고. 언니 옷을 물려받을 수가 없었다니까요.”
-둘째는 언니가 레즈비언인 걸 아나요?
“큰애가 고1 때 동생한테도 얘기했대요. ‘언니가 여자를 좋아해’ 그러니까 중1짜리 동생이 딱 두 마디 했대요. ‘헐, 괜츈!(괜찮아)’(웃음). 지금 둘째도 대학 들어갔는데, 남자친구 만나면서 그랬대요. ‘우리 언니가 동성애자인데, 괜찮아?’ 상관없대서 사귀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가족들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경우가 아직은 흔치 않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 중에서도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지지받으면서 일하는 친구가 극소수라는 사실에 저도 놀랐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부모 입장에서 얘길 하죠. ‘부모가 그렇게 반응하는 게 정상적인 거야. 너무 상처받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해보자’고. 여기 와서 성소수자 아이들을 만나면서 너무나 멀쩡한 애들인데, ‘변태성욕자,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찍어서 직장에서 해고하고,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들 앞에 대놓고 ‘너 레즈비언으로 살면 행복해? 엄마한테 고쳐 달라 그래!’ 그런 소리나 하고…. 작년 겨울에도 크리스라는 19살짜리 트랜스젠더 아이가 자살을 했어요. 이런 부당한 대우, 편견에 마주치면서 내가 어떻게 힘을 보탤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지요.”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꼭 이루고 싶은 일은 뭐예요?
“동성결혼 합법화요. 나나 남편은 먼저 죽을 텐데, 우리 딸이 누굴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서로 위로하면서 늙어가는 걸 보고 죽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것만으론 안심이 안 되나요? 결혼이 중요한 이유가 뭐죠?
“수십년을 같이 살아도,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가 수술을 받아야 할 때 동성배우자는 사인을 할 수가 없어요. 어느 한쪽이 먼저 죽으면 연금도, 보험도 상속도 못 받고, 정작 같이 산 사람보다 먼 친척한테 돌아가요. 우리더러 왜 사냐고 물으면 자식 때문에, 가족 때문에 산다고 하잖아요. 합법적인 가족을 가지는 건 ‘평생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거’예요.”
지난해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고, 미국 최대의 교파인 미국 장로교도 동성결혼을 인정했다. 대한민국 사법부와 보수 기독교의 혐오정서는 여전히 완강하다. 김조광수와 김승환 커플이 동성결혼에 대한 혼인신고를 수리하지 않는 것에 불복해서 소송을 제기했으나 지난 5월 1심 법원은 사건 각하를 결정했다.
-끝으로, 여전히 고민하는 성소수자들에게 엄마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
“(침묵 끝에) 행복해야 해! 인내심 있게.”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 뽀미”다.
녹취 김성희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뽀미(이은재)를 만든 시간들
한 해 만에 퀴어축제에 참여한 부모모임의 회원이 6명으로 대폭 늘었습니다. 펼침막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올해 축제엔 30여명의 부모들이 참가했습니다. 축제에서 했던 ‘프리허그’가 에스엔에스를 타고 널리 퍼지며 이슈가 됐습니다.
활동이 활발해진 올해 상반기 부모모임은 여러 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대화록, 가이드북을 펴내고 부모모임 누리집도 꾸렸습니다.
올해 들어 부모모임 회원들은 무엇보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얼굴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홍보 영상도 만들었습니다.
부모모임에 참여하는 부모들이 점차 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5월 정기모임에 10여명이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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