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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24 16:53 수정 : 2015.06.24 18:07

최근 잇따라 유명을 달리한 연극배우, 고 김운하씨(왼쪽)와 고 판영진씨.

[뉴스AS]
올해 창작지원금 105억 신청
아직까지 정부예산 못받아
가난한 예술인들에 ‘그림의 떡’
사회보장 사각지대 해소하려면
예술인 ‘노동자성’부터 제도화해야

사흘 새 두 명의 배우가 숨졌습니다. 19일 연극배우 김운하(본명 김창규·40)씨가 서울 성북구의 한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문 열기도 비좁은 한 평 반(4.6㎡) 공간이었습니다. 궁핍한 처지였습니다. 알코올성 간질환, 신부전, 고혈압 등의 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 : 한평 반 고시원서 소주병 몇개 남기고 떠난 연극배우)

22일에는 무명배우 판영진(58)씨가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 자신의 집 앞마당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지인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유족들은 판씨가 생활고를 비관하고 우울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 : ‘잡풀은 잡풀…’ 어느 무명배우의 죽음)

많은 언론들이 이들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끝머리에 ‘최고은법’을 거론했습니다. 이 법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최고은법은,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고, 복지 지원을 통해 예술인의 창작활동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제정된 예술인 복지법을 일컫습니다. 최고은 작가는 2011년 1월29일 빈곤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예술인의 실존에 대한 문제 제기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국회는 2011년 11월17일 예술인 복지법을 제정했습니다.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을 만들어 2012년 11월18일 법이 본격 시행됐습니다. 지금부터 이 법이 어떤 부분에서 ‘유명무실했던’ 건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 최고은법 적용 대상

우선 최고은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예술인의 정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술인 복지법 시행령 2조 ‘예술 활동의 증명’을 보면, 예술인은 △저작권법에 따라 공표된 저작물이 있는 자 △예술 활동으로 얻은 소득이 있는 자 △그 밖에 두 사항에 준하는 예술 활동 실적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규정에 따라 각 분야의 ‘저작권법에 따라 공표된 저작물이 있는 자’를 살펴보면, 연극의 경우 △3편 이상의 연극 공연에 출연한 배우(장기 공연은 12주 이상 연속해 모두 36회 이상 출연하면 ‘3년 동안 3편’ 기준을, 8주 이상 연속해 모두 24회 이상 출연하면 ‘3년 동안 2편’의 활동 실적 인정) △1회 이상 연극 공연을 연출한 연출가 △3편 이상의 연극 비평을 관련 잡지 등을 통해 발표했거나 1권 이상의 연극 비평집을 출간한 비평가 △3편 이상의 연극 공연에 참여한 기획·기술지원 스태프 등입니다.

문학의 경우 △5편 이상의 시, 수필 작품을 문예지 등에 발표한 시인이나 수필가 △1편 이상(단편은 3편) 이상의 소설, 평전 작품을 문예지 등에 발표한 소설가 △1편 이상의 희곡 작품을 문예지 등에 발표한 희곡작가 등입니다. 영화의 경우 △최근 3년 동안 영화상영관 등에서 상영되거나 상영등급분류를 받은 3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 △최근 5년 동안 영화상영관 등에서 상영되거나 상영등급분류를 받은 영화를 1회 이상 연출한 감독 등이 대상입니다. 이 밖에도 △미술 △음악 △건축 △국악 △무용 △연예 △만화 등의 영역에 대상자에 대한 세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련 링크 :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증명방법’)

■ 최고은법은 어떻게 시행됐나

한국예술인복지재단(복지재단)은 최고은법에 따라 2012년 11월19일 설립됐습니다. 이사장은 소설가 김주영 작가입니다.

복지재단은 2013년부터 각종 사업을 통해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창작디딤돌’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에서 60억원의 예산을 교부받았습니다. 1831명의 예술인이 1인당 300만원씩 지원받았습니다. 2014년에는 예술인의 생활 안정과 위기상황 극복이 더 절실한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돼 사업 이름을 ‘예술인 긴급복지지원사업’으로 바꿨습니다. 80억원의 예산을 배정받았고, 예술인 1860명이 1인당 최대 800만원까지 지원받았습니다.

하지만 2015년이 문제입니다. 복지재단의 ‘예술인 긴급복지지원사업’이 보건복지부의 긴급복지생계비 사업과 역할이 겹친다는 지적이 나온 겁니다. 복지재단은 2015년 사업 이름을 ‘창작준비금 지원사업’이라고 바꾸고, 예산을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산은 상반기가 거의 끝나고 있는 6월24일 현재까지 한 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지원 사업을 통해 예술인 3500명에게 1인당 300만원씩 모두 105억원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기획재정부 등 정부 내 이견으로 지금까지 1원 한 장 집행되지 않았다. 여전히 보건복지부의 긴급복지생계비 사업과 유사하다는 국무조정실의 지적 때문이라고 한다.” 정진후 정의당 의원의 지적입니다.

김운하씨나 판영진씨 같이 빈곤한 처지에 내몰린 예술인들이 기초적인 지원금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임선빈 서울연극협회 사무국장은 2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에 출연해 연극배우들의 경우 “1년에 1편 정도 출연해서 3개월 동안 한 달에 약 50만원씩 받는다. 1년에 한 150만원의 수입을 거둔다”며 “한 사람이 1년 동안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용”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복지재단은 예술인 복지법에 따른 사업은 이런 지원금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복지재단 사업2팀 김석진 팀장은 “재단이 기관이나 지역에 파견해 활동비를 받는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 불공정 관행을 개선하거나 보험료를 지원해주는 사회보험료 지원, 아픈 분들에 대한 의료비 지원 등의 다른 사업도 하고 있다”며 “창작준비금 지원사업은 예산 규모가 커지다 보니 부처들 간에 조금 더 사업을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어 검토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는 해명입니다.

■ 창작지원금만의 문제가 아니다

긴급한 상황이나 빈곤한 처지에 내몰린 예술인들에게 1년에 300만원 정도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창작 지원금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니 하루빨리 예산이 집행되어야겠지요. 그런데 예술인 복지법에는 근원적인 문제가 더 있습니다.

우선 복지재단의 재정 독립성 문제입니다. 이번 예산 미집행 문제가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이지요. 현재 복지재단은 여러 가지 사업을 설계해 이를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에 승인을 받아 예산을 교부받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위원장은 “복지재단이 계속해서 문화체육관광부의 눈치를 보게 되니 사업을 통한 시혜적 지원 시스템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며 “정부 교부금에 의지하지 않고 재정을 확충할 수 있는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2011년 1월29일 빈곤을 겪다 숨진 고 최고은 작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회보장 체계에 편입할 수 있도록 예술인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현행법상 예술인은 ‘특정한 사업 내지 사업장에서 근로하는 자’로 규정되지 않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4대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지재단을 통해 산재보험 가입은 가능하지만, 보험료를 모조리 예술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나도원 공동위원장은 “일반 직장 노동자들은 직장과 노동조합이 고용보험료 등을 같이 부담하고 있다”며 “예술인 직종 자체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4대 보험 가입 요건을 완화하는 것에 더해 문화산업을 통해 일정 정도 이익을 얻고 있는 기업들이 기금을 조성해 보험료를 분담하는 형식의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예술인 복지법 제정 단계에서 이런 주장을 계속했지만, 고용노동부나 기획재정부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좌절됐다”며 “예술인의 사회보장 체계에는 노동자성 인정이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인의 빈곤 문제는 한국 사회의 사회보장 체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리트머스 종이입니다. 예술 작품이 예술인 개인의 물적 자산이면서도 구성원들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사회적 자산임을 인정한다면, 예술인의 실존 문제 역시 사회적 문제일 겁니다. 우리가 최고은법의 근원적인 문제에 좀 더 눈길을 둬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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