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꺼둥이’를 아십니까? - ① 휴가철 서울역 노숙인 르포
떨꺼둥이? 이 낯선 낱말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언어영역 문제 하나 풀어보자. [문제] 다음 중 지문에 나오는 ‘떨꺼둥이’의 뜻으로 적절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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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구걸하는 사람
② 무능하고 나태한 사람
③ 더럽고 지저분한 사람
④ 노숙인 [해설] 어려운 문제다. ①번부터 ④번까지 다 넣어도 말은 성립된다. 하지만 정답은 ④번이다. 떨꺼둥이란 홈리스(Homeless)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이다. ①~③과 ④을 구분하는 변수는 집이다. 집이 있는 사람도 구걸을 하거나 나태하거나 지저분할 수 있다. 하지만 ‘의지하던 집에서 쫓겨난’ 사람은 구걸을 하지 않더라도, 능력 있고 부지런하더라도, 깨끗하고 말쑥하더라도 떨꺼둥이다.
전체 노숙인 60%가 일하는 노숙인 여름, 시민과 노숙인과의 불쾌한 만남이 늘어난다. “날씨도 더운데 냄새는 역겹고, 왜 저러고 있나 싶죠.” 지난 30일 서울역. 여름휴가를 가려고 이곳을 찾은 시민들은 노숙인과의 짧은 만남을 경험한다. 역 앞 광장에서 잠을 자거나 구걸을 하는 노숙인들은 휴가에 들뜬 시민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더럽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시민들이 ‘노숙인’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다. 여름에는 여기에 더위로 인한 짜증까지 더해진다. 이우진(가명·34·회사원)씨는 “얼마 전 직장 동료가 서울역 근처를 지나다 노숙인이 옷을 붙잡고 놓질 않아 곤혹을 치렀다”며 “출퇴근길에 서울역에서 노숙인들을 많이 보는데, 왜 저러고 사나 싶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광명에 사는 김해인(가명·35·주부)씨도 “다 같이 이용하는 시설인데 여기저기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도 있다”며 “여름인데 씻지 않아 냄새도 역겹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생각하는 노숙인과 실제 노숙인은 다르다. 전국실직노숙자대책 종교시민단체협의회(이하 전실노협) 조성준 간사는 “시민들이 생각하는 더럽고 지저분한 노숙인은 전체 노숙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며 “전체 노숙인의 60% 정도가 구직의사가 있고,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일하는 노숙인 대부분은 건설일용직에 종사하지만 일자리가 늘 있는 것은 아니다. 전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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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노숙인들은 쉼터나 쪽방에 몰려 있는 경우가 많아 시민과 직접 마주할 기회가 드물어서 생긴 오해라는 설명이다. 또, 서울역, 영등포역 등 공공 역사 일대의 거리노숙인들 가운데도 알게 모르게 일하는 노숙인들이 제법 섞여 있다. 2004년 6월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실시한 거리노숙인 설문조사에서도 30%는 일용직 등 일반 노동시장에서 정상적인 노동을 통해 수입을 얻고 있다고 응답했다. 건설현장에서 샤워하고 서울역으로 퇴근하는 9년차 허성철씨 서울역에 사는 허성철(가명·57)씨는 9년차 떨꺼둥이다. 구제금융 때 일자리를 잃고 노숙을 시작했다. 타일기술자인 그는 그동안 서울역에서 살며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쉼터와 쪽방 생활도 간간히 했지만, 요즘 같은 여름에는 밖에서 잠을 잔다. 쉼터는 규율이 엄격해 답답하고 한 달에 20만~25만원, 하루 5000~7000원하는 쪽방은 너무 비싸단다. 그는 “저녁에 서울역 앞에서 배낭매고, 안전화 신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일용직에 종사하는 노숙인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현장 샤워시설에서 씻고 퇴근하기 때문에 언뜻 봐서는 행인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게 허씨의 설명이다. 밤이 되자 허씨 말대로 배낭을 맨 노숙인들이 역 앞 광장에 모여든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한번에 두세명씩 눈에 들만큼 상당한 숫자다. 비교적 깔끔한 차림의 그들은 계단이나 벤치에 앉아 담배를 나누어 핀다. 일행을 기다리는 여행객 같다. 대낮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노숙인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새벽 4시반에는 일어나 일을 가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밤 11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든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옛 역사 뒤나 근처 공원이 이들의 잠자리다. 허씨는 “잠도 잠이지만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노숙인들이 서울역으로 모이는 이유”라고 했다. 전실노협 조 간사는 “새벽 5시면 남대문경찰서 앞에 인력시장 버스가 오지만, 노숙인 모두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일을 못 구한 노숙인은 6시쯤 지하철역에 들어와 잠을 자는데, 출근하는 시민들은 노숙인들이 누워있는 것만 보고 노숙인 모두가 나태하다고 한다”고 말했다.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이하 노실사) 문헌준 대표는 “알고보면 노숙인들도 다 같은 사람들인데 스쳐 지나가며 보는 게 전부인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편견을 가지는 것 같다”며 “알코올 중독 등 치료가 필요한 일부와 일할 수 있는 대부분의 노숙인을 한묶음으로 보고 펼치는 정책이 문제”라고 말했다. 열대야 피해 나온 시민처럼 잠들다…그러나 돌아갈 곳이 없다 시민에게 서울역은 공공장소이지만, 허씨에게 서울역은 생애 마지막 주거지다. 이미 주민등록이 말소된 그에게 서울역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역 지하도 구석에서 무료급식을 하고, 일이 없는 날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옷을 빨아 옛 역사 계단에 널고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바람이 선선한 저녁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친구들과 술 한잔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행인들의 시선이 불편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허씨. 그의 생활은 그대로 공공에게 노출된다. 사생활 보호를 주장할 공간이 그에게는 없다. 노실사 문 대표는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안과 밖의 생활을 구분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라며 “노숙인들의 특수한 환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비록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노숙인들은 쉼터를 통해 꾸준히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전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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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서울역에서 충정로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서소문공원. 50여명의 노숙인들이 철길을 따라 쳐진 철조망 옆에서 신문이나 돗자리를 깔고 잠을 청한다.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마주한 그들은 열대야를 피해 나온 시민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돌아갈 집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달빛에 반사된 그들의 까무잡잡한 피부는 딱딱하게 굳은 청동조각 같다. 어디 한군데 의지할 곳 없는 그들은 자신의 피부로 만든 ‘청동조각 집’ 안에서 잠을 잔다. “노숙 시작할 때는 악착같이 벌면 빨리 집으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집이 없어 그런지 아무리 벌어도 돈 모으기가 쉽지 않아요.” 허씨는 답답함을 호소한다. 서울역에서 시민들은 계단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바닥에 팽개쳐진 떨꺼둥이에게는 삶의 한 계단을 올라서기가 여간 벅찬 게 아니다. 처음 문제의 답은 ‘④번 노숙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경쟁에 내몰린 채 언제 도태되고 배제될지 몰라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이 잠재적 떨꺼둥이가 아닐까. 서울역을 바쁘게 노숙인들을 스쳐지나가는 우리 모두가 거기에 해당한다. 김연주 인턴기자 mintcandy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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