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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7 16:29 수정 : 2005.07.17 16:30

경찰이 남영동 보안분실 자리에 인권 기념관을 만들기로 결정, 1980년대 민주화 운동 탄압의 상징적 장소로 여겨진 남영동 분실이 2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됐다.

남영동 보안분실은 신군부 시절 숱한 민주화 인사들에 대해 고문과 허위 자백 강요가 자행된 곳으로 1980년대 민주화인사를 포함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들이 이 곳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남영동 보안분실이 대중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86년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

서울대 언어학과 2학년이던 박씨는 그해 1월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 등을 받다 숨졌고 이 사건은 1987년 민주화항쟁의 촉매로 작용했다.

박종철씨에 앞서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을 맡던 1985년 남영동 분실에서 23일 간 10여 차례에 걸쳐 5~6시간씩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살인적인 고문을 당한 바 있다.

당시 김 장관을 고문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2000년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1980년대 중반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사건에 연루돼 남영동 분실에서 조사를 받은 문용식(46) 나우콤 대표는 지난해 4월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칠성판에 묶인 채 얇은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 쓰고 물고문을 받았다"는 끔찍한 고문의 진상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밖에 21년 만에 위장간첩 혐의를 벗은 함주명씨와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 등도 이 곳에서 고문을 받았다.


경찰청 보안국 보안3과 남영동 분실의 실제 주소는 용산구 갈월동 88번지. 그러나 국철 남영역 바로 뒤편에 있다는 이유로 남영동 분실로 불려왔다.

1976년 건축된 남영동 분실은 대지 3천여평에 건평 1천600여평으로 7층 본관과 2층 짜리 부속건물, 2층 짜리 별관과 테니스 코트 2면 등으로 구성됐다. 현재 경찰청 보안과 직원 51명이 근무하고 있다.

치안본부가 1991년 경찰청으로 개편되면서 대공분실에서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꿨으며 현재는 대공ㆍ방첩 업무를 기본으로 탈북자 관리 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다.

2000년 리모델링을 계기로 5층의 조사실은 모두 모습을 바꿨으나 박종철씨가 고문으로 숨진 509호실은 `역사 보존' 차원에서 욕조와 변기, 침대 등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남영동 대공ㆍ방첩 업무의 특성상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돼 왔으나 박종철씨의 아버지 박정기(76)씨가 아들의 14주기인 2001년 1월 우여곡절 끝에 아들이 숨진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위령제를 열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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