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 뒤에 숨은 정부에 쐐기박아
이용훈체제 사법부 ‘과거청산’ 의지 풀이
서울고법이 14일 최종길 교수 유족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유족들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동안 ‘소멸시효’라는 방어막 뒤에 숨어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상책임마저 회피해 왔던 국가의 태도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특히 재판부는 중대 인권침해 범죄에서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있는 국제규약까지 거론하며 “이를 민사소송에도 동일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밝혀,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까지 제시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피해를 본 국민들에 대해 정정당당하게 불법행위 자체가 있었는지를 다투는 것은 몰라도,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방어 방식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은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동안 피해자나 그 가족들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내면 “청구권을 행사할 시효가 지났다”며 빠져나갔던 정부의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재판부는 또 1988년 최 교수 관련 의혹의 조사해 놓고도 내사 종결한 검찰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당시 검사는 최종길 사건이 조작됐다는 자료를 충분히 갖고 있었고, 조사를 더 하면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도, 충분한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사전에 짜맞춘 중정 수사관들의 허위진술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재판부가 특히 1990년부터 우리나라에서 발효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B규약)’에 따른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시효 배제 원칙을 이번 판결에 고려한 것은 신의성실 원칙을 들어 최초로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았던 ‘수지 김’ 판결 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현재 국제형사재판소는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나 고문과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에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
재판부는 “중대한 인권침해는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이 국제법의 일반법칙”이라며 “이러한 원칙은 공소시효에 관한 논의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민사상 소멸시효를 적용할 때도 동일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판결문에는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의 부당함이 명쾌하게 정리돼 있지만, 관심이 가는 대목은 이 사건의 상고 여부다. 수지 김 사건의 경우 법무부가 항소를 포기해 판결이 확정됐지만, 대법원 판례로 정립되지 못한 까닭에 유사 사건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과거사 반성에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대법원이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수지김 사건의 법률 대리인이었던 이덕우 변호사는 “노동 사건에서 소멸시효 주장이 배제된 대법원 판례는 있지만,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소멸시효를 어떻게 적용할지를 제시한 판례는 아직 없다”며 “선의·악의를 떠나서 법무부의 상고를 통해, 대법원의 판례를 통해 소멸시효 문제가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법원, 국회, 정부 어느 한 곳에서라도 각성된 의식을 가지고 과거사 반성과 이에 따른 배상 문제에 접근한다면 이 과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며 “그동안 국가의 명백한 불법행위로 고통을 겪은 피해자에게 무조건 소멸시효를 주장하고 항소·상고하는 관행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또 “국가폭력 사건에서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금지하는 별도의 입법이 없어도 법무부가 소멸시효를 주장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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