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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권에서 민중신학을 실천해온 김병균 목사는 오는 29일 나주 고막원교회에서 40년 목회 활동을 마친다. 올해 칠순을 맞아 손주들의 생일 축하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고막원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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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안병무 민중신학’ 감화
“약자 고통 함께해온 광야의 소리”
3차례 구속·5차례 법정·소송 ‘고초’ ‘민중신학·주체사상 대화’ 박사학위
‘실천적 목회 40년’ 오는 29일 은퇴 김 목사는 성도들한테 ‘광야의 소리’라고 불린다. 불의가 판치는 광야에서 불꽃처럼 강렬하게,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선지자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준 애칭이다. 평소 조용한 성품인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뛰어나가 싸운다. 참가자가 많지 않아 맥빠졌던 집회도 그가 우렁차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포효하면 금세 분위기가 바뀌곤 한다. 전남 강진 출신인 그는 광주서중 2학년 때인 1960년 ‘4·19혁명’ 시위 대열을 만났다. 1970년대 중반엔 ‘민중신학의 개척자’인 안병무 박사가 펴내던 잡지 <현존>을 읽으며 역사의식을 깨우쳤다. 그의 신학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 약자, 가난한 자,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줄곧 양심수, 농민, 학생, 세월호 가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1978년 장성 양유교회에서 시작해 장흥, 신안, 나주 등을 거치며 40년 동안 목회 활동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불의에 함께 분노하고, 약자에 함께 아파한다. 남과 북, 동과 서, 빈과 부가 연대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마중물이 되겠다”는 소신을 견지했다. 1980년 5·18민중항쟁을 목격한 그는 이듬해부터 서슬 퍼런 군부독재에 맞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열에 앞장섰다. 1987년 4월에는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광주전남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소속 목사 30여명과 함께 13일 동안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는 단식기도회를 열었다. 1990년대는 장기수, 양심수, 민가협. 유가협을 지원하며 전국의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리기도 했다. 또 농촌선교를 위해 나주 고막원에 작은 교회를 꾸리고 주민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단보당 벼 23.5㎏이던 수세가 폐지됐고, 교통의 오지인 고막원역에는 ‘통일호’가 멈추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다른 산업은 망해도 농업은 망할 수 없다. 농촌이 망하면 결국 나라가 망한다. 농촌의 어려움을 남북이 농업통일을 이뤄 해결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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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안병무 선생의 민중신학에 영향을 받아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병균 목사는 평생토록 ‘약자들의 현장’에 함께 했다. 사진 고막원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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