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17 19:28
수정 : 2017.09.17 21:53
【짬】 베스트셀러 ‘라틴어 수업’ 쓴 한동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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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신부는 신학교 시절 극심한 방황 때문에 그리스어 공부를 제대로 못해 아쉽다고 했다. 그때 그를 방황으로 이끌었던 질문에 답을 찾았느냐고 묻자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신과 종교, 종교와 인간, 제도로서의 교회와 인간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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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47) 신부가 지난 6월말 펴낸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은 두어달 만에 5만권 이상 팔렸다.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다. 책은 그가 2010~2016년 서강대에서 가르친 ‘초급 라틴어’ 강의 내용이 중심이다. 라틴어 단어나 문장을 앞세워 서유럽 로마 기독교 문명의 저변을 흐르는 사고나 관습을 살핀다. 그는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로타 로마나) 변호사이기도 하다. 지난 8일 서울 연희동의 한 카페에서 한 신부를 만났다.
먼저 물었다. 왜 책이 많이 팔릴까? “저도 계속 생각 중입니다. 사실 그동안 안 팔리는 책만 써왔거든요. 특별한 책이 아닌데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세대 불문하고 위로나, 삶에 대한 작은 지침이나 격려가 필요하다는 뜻 아닐까요? 우리 삶이 그만큼 고단하고 피곤하다는 것 같아 한편으론 우울해요.”
서강대 라틴어 강의는 지난해 1학기로 접고 지금은 연세대 법무대학원과 일반대학원 법학과에서 ‘유럽법의 기원’을 가르치고 있다. 로마 시대 학교 교사들은 첫 수업 때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라고 했단다. ‘첫 수업은 휴강이다’란 뜻이다. 한 신부도 첫 수업 때 이렇게 말하고 ‘운동장에 나가 봄기운에 흩날리는 아지랑이를 보라’고 숙제를 준다. 아지랑이는 라틴어로 ‘네불라’이다. ‘보잘것없는 사람’을 뜻하는 ‘네불로’에서 파생했다. 자기 마음속에 어떤 아지랑이가 피어 있는지 살피라는 의미일 것이다.
‘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페르시아 사람들을 위한 요한 서간 강해>에 나온다. 한 교수는 중국 서부 밍사산 사막 여행 중 이 문장을 떠올렸다고 했다. ‘공부를 계속 해야 하나’를 놓고 번민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학생들에게 고백한다.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이 또한 지나가리라!)란 라틴어 경구를 두고는 “고통스러운 일이 많을수록 자기 긍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공부하는 노동자’라고 말한다. 이력을 보니 수긍이 간다. 서울에서 태어나 동성고 시절 사제의 길을 택한 뒤 광주가톨릭대 학부와 부산가톨릭대 대학원을 거쳐 2001년 로마로 유학을 갔다. 3년 만에 교황청립 라테라노대에서 교회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3년 과정의 로타 로마나 사법연수원 과정을 마쳤고 변호사 자격시험도 통과했다. 그는 로타 로마나 700년 역사상 930번째 변호사다. 연수원을 졸업해도 5~6%만이 합격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국가 출신 최초 로타 로마나 변호사가 된 것이다.
요즘도 일년에 두달가량 로마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변호사로서 로타 로마나의 장기 미제사건을 다루고 있다. 최근 대법원이 준 숙제는 ‘메트로폴리탄을 교회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이다. 로타 로마나엔 대법원장 외 대법관 22명이 있다. 신부이면서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나 검사로 활동한 이들이 대개 대법관이 된다. 대법관을 꿈꾸느냐고 묻자 손사래를 쳤다. “판결의 무게가 너무 무겁습니다. 전 책을 쓸 겁니다.”
‘강의록’ 바탕…두달 만에 5만부
라틴어 낱말 통해 삶의 지혜 전달
“위로·지침 필요하다는 뜻인 듯”
첫 동아시아 출신 바티칸 변호사
12년 만에 ‘교회법률용어…’ 번역
“교황도 교회법 개혁에 큰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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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신부가 2014년에 펴낸 <카르페 라틴어>(종합편) 표지. 3천부 이상 나가 최근 4쇄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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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큰 숙제 하나를 끝냈다. 12년을 매달린 일이었다. 이탈리아의 권위있는 교회법 사전 <새 교회법 사전>의 우리말 번역본 <교회법률용어사전>을 펴냈다. 그가 2013년 펴낸 <유럽법의 기원>이나 2014년 나온 라틴어 교재 <카르페 라틴어>는 모두 이 사전을 충실히 번역하기 위해 공부하면서 쓴 책이다.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이탈리아어 관용어 사전>도 마찬가지다.
사제가 왜 법 공부를 하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군인입니다. 주교가 하라고 하면 해야죠. (사제들은) 모두 철학이나 신학을 공부하려 해요.” 스스로 선택한 전공이 아니란 얘기다. 그는 “법이 꼭 세속적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제일 먼저 교회법을 태웠죠. 법은 악마의 공부, 세속의 공부라고 했어요. 그래서 개신교는 교회법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 개신교를 보세요. 목사 세습이나 교회 재산 다툼이 불거지면서 교회법을 다시 세우려 하고 있어요. 헌법의 기원을 아세요? 사상과 양심, 표현, 출판,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기본권은 바로 종교의 자유에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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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신부가 지난 5월 출간한 <교회법률용어사전>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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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연세대 강의는 이종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했다. “<유럽법의 기원>을 내자 로스쿨 교수들이 관심을 보였어요. 우리 법이 독일·일본을 거친 대륙법 체계인데, 제 책이 로마법에서 독일법으로 이어진 시기를 다뤘거든요. 자료도 없고 잘 몰랐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칭찬해주더군요.” 최근 영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쪽 대학으로부터 ‘강의해달라’는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책에서 “신학과 법학이 경직되고 닫힌 사고의 실타래를 좀더 유연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신앙과 종교도 인간 존재를 위한 것이죠. 어느 순간 진리로 인정되면 거기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시대나 제도적 한계가 안타까워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물었다. “우리 시대가 맞이할 수 있는 교황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겸손과 가난은 그분 생각의 일부입니다.” 예를 하나 들었다. “예전에 대법원에 가면 아무 설명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게 했어요. 지금은 ‘30분 정도 기다리면 된다’고 설명하고 커피도 줘요. 교황이 바뀐 뒤 생긴 변화죠. 교황이 가장 개혁하고 싶은 게 교회법입니다. 신자나 세상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바꾸고 싶어해요.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교회 소송 비용도 무상으로 하라는 지침을 내리셨죠.”
목표는? “산 정상에 올라 조망하면서 글을 쓰고 싶어요. 최근 낸 책들은 산의 30% 정도만 올라 쓴 것 같아요. 독자들에게 미안하죠. 라틴어 한글 사전을 낼 겁니다. 인간과 종교, 법과 종교, 종교와 과학에 대한 책도요.”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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