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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9.18 14:29 수정 : 2007.09.18 15:49

해강스님

1년 ‘미친듯이 놀다 온’ 해강 스님

열여섯부터 전국누빈 최연소 선방 수좌 어느날…

바람따라 들짐승 처럼 머릿속 하얗게 “부타타다~”

전북 남원 실상사 화림원 학감(학장격)을 지낸 해강 스님(44)이 오토바이를 타고 히말라야를 누비고 돌아왔다. 지난해 8월부터 1년간이었다. 13일 실상사에서 만난 스님은 “미친 듯이 오토바이 타고 달리면서 놀다가 온 것 외엔 얘기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는 또 “1년간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녔다”고 했다. 해강 스님은 그렇게 놀다 왔다. 그래서 “머리 속이 하얗다”고 했다. 그의 머리가 1년 여행 뒤에도 뭔가로 가득 차 있다면 그를 찾을 이유는 없었다.

불교 고등 교육기관 화림원 13년 지켜온 터줏대감

해강 스님은 지난해까지도 불교계의 대안적인 고등 교육기관으로 지성의 요람인 화림원의 터줏대감이었다. 지난 94년부터 13년이나 화림원을 지켜온 그였다. 불교계 대학원격인 화림원의 대장이면서도 언제나 공양간 살림 등 궂은 일을 도맡아온 그였다. 화림원 공양간 보살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반찬을 만들고 죽을 끓이는 새색시 같던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히말라야를 누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이 스물에 ‘지금은 스승 없다고 선언해 혼나기도’


그러나 해강 스님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열다섯 살에 도봉산 망월사로 출가했던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전국 선방을 누빈 ‘불교계 최연소 선방 수좌’였다. 10대 때부터 선방에서 50~60대 선승들 틈바구니에서 참선을 했고, 불과 열일곱 살에 부여 화산 석굴암에서 겨울철 홀로 6개월을 살기도 하고, 빈집에 들어가 살면서 참선을 하기도 했다. 생사를 타파해보려는 일념으로 화두를 들고 정진하면서 막히고 의심이 들 때마다 스승을 찾아 길을 나섰다. 그러나 누구 하나 시원스럽게 답변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는 스무 살이 되자 ‘지금은 무사(無師)시대’임을 선언했다. 스승다운 스승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선배 수좌들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설산이 보이는 히말라야에서 자신이 타고 다디던 오토바이와 함께 선 해강 스님 (해강 스님 제공)

2~3년 힌두 티벳 찾아다녀 ‘인도 귀신’

바람처럼 전국을 떠돌다 그가 인도로 떠난 것은 1989년. 그는 한국에서 못다 푼 의문을 풀기 위해 인도의 바라나시와 히말라야 등의 힌두 수행아쉬람(수행처)과 티베트명상센터들을 들짐승처럼 찾아다녔다. 그렇게 2~3년간 인도를 훑어 인도에 관한 한 귀신이 된 그는 94년 말 화림원에 들어온 뒤 거짓말처럼 역맛살기를 그치고 살았다.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 틈새서 중퇴 출신으로 말석에

실상사엔 도법-수경-연관 스님 등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화림원에도 현 실상사 주지인 재연 스님과 각묵 스님 등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등 초기 경전을 해독할 수 있는 ‘선수’들이 포진했다. 화림원은 늘 경전을 읽은 뒤 진솔한 토론이 뒤따랐다.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중학교 때 학교를 뛰쳐나와 출가한 그도 말석에 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용한 해강 스님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도법 스님과 재연 스님도 경전을 보는 해강 스님의 남다른 안목에 놀라곤 했다.

새색시 같던 그가 무람 없이 지내는 것 보고 혀 내둘러

미래 불교의 산실인 실상사의 주지로 도법 스님과 재연 스님이 적극 민 것도 그였다. 그러나 그는 화림원 학감자리조차 내놓고 지난해 다시 인도로 떠난 것이다. 인도 중부 푸나에 도착해 유학생이 쓰던 350cc 오토바이를 인계받아 히말라야 다르질링으로 향한 그는 그가 가르쳤던 화림원 학승들과 만나 한두 달간 여행을 함께 하기도 하고, 홀로 키노르와 라다, 스리나가르 등 고지를 누볐다. 그와 합류했던 화림원 학승들은 새색시처럼 화림원을 지키던 그가 영어는 물론 힌두어까지 구사하면서 현지인들과 가족처럼 어울리고, 현지인들 집에 들어가 염치 좋게 숙식까지 해결하는 것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목적도 없이 화두도 없이 다만…

특히 그의 외모까지 히말라야 산간지역 사람들과 같아 외국인의 개인 입국을 허용치 않은 부탄에도 현지인처럼 들어가 구경한 그였다. 그는 10여년 전과는 달리 이번엔 수행처엔 거의 들르지 않았다. 힌두교인, 무슬림, 불교인 가리지 않고 아무하고나 함께 얘기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잤다.

그는 “바람처럼 다니면서 함께 어울렸을 뿐”이라며 “아무런 목적도 없었고, 배운 것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같다”고 했다. 다만 어울리며 히말라야 사람들과 함께 했던 그의 웃음에서 히말라야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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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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