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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1.21 18:22 수정 : 2006.11.21 18:22

도신, 어버이 같던 법장스님 기려
“너의 노래는 유언이냐 무언이냐”
사랑·깨우침 생생히 담아 책으로

2년 전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열반한 법장 스님의 빈소엔 마치 육친의 죽음을 맞은 것처럼 오열하는 출·재가자들이 많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법장 스님이 수덕사에 데려와 키워 그를 부모처럼 여기던 이들이었다. 법장 스님의 주검은 평소의 뜻에 따라 ‘생명 나눔’을 위해 병원에 기증됐기에 다비식이 없었고 그는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으나 이들이야말로 그가 남긴 진짜 사리였다.

도신 스님(사진)도 그 중 하나였다. 그가 〈노래하는 도신 스님의 사부곡〉(혜민기획 펴냄)이란 책을 ‘나의 스승 법장 스님’이란 부제를 달아 냈다. 제목이 말해주듯 법장 스님은 그에게 스승이기 전에 부모였다. 금성(속명)이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 간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술만 드시다 세상을 뜬 뒤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고 세 여동생은 외국으로 입양돼 떠난 뒤 절에 맡겨진 것이다. 그곳엔 같은 처지의 동자승들이 열 명 남짓 살고 있었다. 호랑이 같던 노스님에게 꾸중을 듣고 주눅이 들어있던 동자승들에게 법장 스님은 언제나 따사로운 햇살 같았다. 스님은 불전에 올려지는 과일 등을 보며 군침만 삼키던 아이들을 위해 과자와 달걀을 보자기에 싸와 먹여주곤 했다.

17살 때 법장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아 도신 스님이 된 그는 노래에 미쳤다. 그는 중광 스님과 살며 기타를 치고, 가수 이남이와 신중현에게 작사·작곡을 배웠다. 스승은 기타를 발견할 때마다 기타 대가리를 여지없이 분질러버렸다. 그러고도 스승은 객지의 제자를 위해 남몰래 용돈을 놓아두고 갔다. 도신은 스승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출가승 최초로 국악가요 음반을 냈다. 스승은 어느 날 “너는 은사하고 인연을 끊을지언정 노래는 끊지 못할 녀석이구나”라시며 눈시울을 적셨다. 스승은 열반하기 몇 년 전 도신을 불러 말 없이 차를 따르다 “너의 노래는 유언(有言)이냐? 무언(無言)이냐?”고 묻는다. 수없이 노랫말만 외었던 도신은 그 스승의 간절한 질문에 부처님의 무언의 삶을 따르려고 충남 서산 서광사란 절로 향했다. 처음으로 승려의 본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오늘도 ‘아버지 스님’이 그리워 눈물 지으며, 기타줄을 감던 손에 목장갑을 끼고 흙반죽을 이기며, 법당을 짓고 있다.

글·사진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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