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선원에서 지선스님이 만암선사의 철저한 정신과 삶의 자취가 스며 있는 백양사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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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불교’ 설파 빈민구제 혼신 흉년들면 공사벌여 품삯
“눈이 오니 풍년 들겠구나”
대중들과 기뻐하다 입적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백양호수 맑은 물 옆길을 거슬러 발자국이 나있다. 서산대사의 부도탑지 옆에서 눈 길을 걸으니 어찌 대사의 시가 더욱 간절하지 않을까. 부도탑 인근 절 입구엔 쌍계루가 있다. 백암산의 산봉우리 백학봉 좌우에서 흘러내린 물이 냇물이 되어 만나는 곳이다. 이 물을 만암 선사(1876~1957)가 막아 보를 쌓았다. 백양사는 예부터 가장 가난한 절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만암은 주지가 되자 죽을 쑤어먹을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하촌의 집들에 곡식을 나눠주었다. 이 때 신세를 진 마을 사람들이 가을 추수 때 흉년인데도 곡식을 지고 되갚으려하자 다음해부터 보막이 공사를 벌여 노임을 줘서 구제사업을 펼쳤다. 일거리가 사라지면 멀쩡한 보를 다시 터서 또 공사를 벌여 노임을 주곤 했다. ‘이뭣꼬’ 씨름 7년만에 득도 전북 고창에서 빈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만암은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1살 때 어머니마저 잃자 곧 출가했다. 어머니가 흰양을 안은 태몽을 꾸고 그를 얻었다니 흰양을 뜻하는 백양사 출가는 필연이었을까. 당대의 대강백 한영·환응 스님 등으로부터 배워 불과 25살 때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됐던 그는 교학에 그치지 않고 ‘이뭣꼬’(이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들고 7년 동안 정진하다 마침내 운문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 학명 스님을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만암을 만암이게 한 것은 그의 삶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300년간 닫혀 있던 산문을 중생을 위해 활짝 열어젖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노승들의 반대에도 산내 청류암에 광성의숙이란 교육기관을 만들어 훗날 조국과 불교계를 이끌 인재양성에 나섰다. 이런 열정으로 만암은 1928년부터 3년 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1947년엔 광주 정광중고교를 설립했다. 그는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며 스님들에게 산에서 칡넝쿨과 싸리나무를 베어다 소쿠리를 만들고, 대나무를 베어다가 바구니를 만들게 했다. 또 곶감을 만들고 벌을 쳤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 동안 신세진 불자들에게 보내졌다. 처음엔 “중들이 수행이나 하면 되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불만의 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만암은 직접 낫을 들고 일에 앞장섰다. “선과 농사는 둘이 아니다” 일이 많다고 수행을 게을리 하는 것을 그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새벽과 저녁 예불에 참여하지 않는 중은 밥도 주지 말라고 엄명했다. 만암의 말년에 3년 간 그를 시봉했던 서울 용화사 한주 학능 스님(67)은 “큰스님은 뒷방에 거처하지 않고 대중방인 향적전 옆에 조그만 방에서 거처하며 늘 대중생활을 했으며, 열반하기 며칠 전까지도 늘 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며 조석예불에 참석하고, 방에 돌아와서는 밤새 좌선 정진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만암의 슬로건은 ‘선농일여’(禪農一如:선과 농사가 둘이 아님)였다. 그렇다고 그가 사찰 운영을 ‘독재적’으로 한 게 아니었다. 절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대소사를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게 대중공사다. 그는 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중의 합의로 일을 해나갔다. ‘백양사에서 (대중)공사 자랑 말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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